함풍이씨 시조는 휘 광봉조 이신 이유.
1) 표지/ 진본 : “함풍이씨 족보”와 가짜 “무진보”
오른쪽 2권 사진은 서기 1688년 발행된 원본 족보 “咸豊李氏族譜 乾, 坤 2권” 이다. 왼쪽 사진 2권은 표지 및 내용을 고친 “戊辰譜(무진보) 가짜 족보이다. 자기네 입맛대로 거짓으로 조작해서 팔아먹은 족보이다. 원본이 2012년에 발견되었기에 망정이지 발견되지 않았다면 가짜 무진보가 진짜인양 믿었을 것이 아닌가? 원본에 뚜렷이 함풍이씨 족보라고 되어있지 않은가!
2) 현 함평이씨의 氏族(씨족)의 淵源(연원)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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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이씨 시조 이 언(李 彦)은 고려 태조(918년)때 부원군(府院君)에 봉(封)해졌다고 족보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료에 맞지 않다.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신무위대장군(神武衛大將軍)이란 관직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고려 태조 때는 군봉제가 없었다고 한다. 모두 후대에 지어낸 거짓이라고 본다.
3) 한국인의 뿌리 나의 조상은 누구인가 ? (함평이씨 편 33페이지)
“함평이씨 시조는 고려 광종(950년)때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언(彦)이시다.“ 라고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신호위대장군은 고려 광종 때 없는 관직이며 신호위(神虎衛)는 고려성종(14년) 즉 995년에 창설된 관직이다. 그래서 거짓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시조는 10대손 종생(從生)조라고 기록돼어 있으나 이것 역시(亦是) 잘못된 것이다. 시조의 10대손 종생조는 장양공파(莊襄公派)의 한 파의 중시조는 될 수 있을 지언정 모든 함평이씨의 중시조는 어불성설이고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허무 맹랑한 글이 종친간의 불신과 위화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장양공파 종생조 외에 23명의 11세 파조의 후손들이 엄존(儼存)하고 있는데 어떻게 함평이씨의 중시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장양공파를 제외한 모든 함평이씨에 결례되는 글이다. 이런 글을 쓰거나 방조한 자는 대종회 종무를 보면 안 되는 것이다.
4) 우리의 시조는 누구인가? (성씨총람 함평이씨 편 194페이지)
함평이씨 시조 이 언(李 彦)은 고려 고종(高麗 高宗~1214년)때 신무위대장군으로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고 그의 후손 이광봉(李光逢)은 삼사사(三史司)로 벽상삼한삼중대광 좌명공신(壁上三韓三重大匡 佐命公臣)으로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함평이씨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앞뒤가 안 맞는다.
함풍이씨 시조공 휘 광봉(諱 光逢)조에 대한 기록은 사실이다. 함풍부원군에 봉해졌다고 했으니 처음에 본관을 함풍이씨라고 한 것이다. 1688년 무진보 원본 표지를 보면 뚜렸이 ”咸豐李氏 族譜(함풍이씨족보) 라고 되어 있지 않은가? 이것이 휘 광봉조가 함풍이씨 시조라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나중에 본관을 함평이라 한 것은 세도가인 한 종문에서 몇 백년 앞을 내다보고 목적달성을 하기 위해 바꾼 행위이다. 그 이유는 고려시대는 함평이란 지명이 없었고 함평이씨 시조공 휘 이 언(諱 李 彦)조의 직위. 연대(職位,年代)가 고려시대에는 잊지도 않은 관작이므로 모두 다 거짓으로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함풍이씨(함평이씨) 시조는 부동의 휘 광봉조인 것이다.
나 광범이 위에 찍은 글자 단 한.자 한.획도 더 하지도 안하고 덜 하지도 안하고 여러 문헌(文獻獻)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손까락이 둔한 90대의 늙은이가 또박 또박 찍은 것이오니 시간 나실 때 읽어보시고 혹 모순(矛盾)된 점 있으면 질책(叱責)하시길 바라오며 족친 여러 분의 가정에 만복이 충만하시길 기원 하옵니다.
글/ 광범 (교수공파) 전 서울종친회장, 대종회 고문
함풍이씨 시조는 휘 광봉조 이신 이유.
1) 표지/ 진본 : “함풍이씨 족보”와 가짜 “무진보”
오른쪽 2권 사진은 서기 1688년 발행된 원본 족보 “咸豊李氏族譜 乾, 坤 2권” 이다. 왼쪽 사진 2권은 표지 및 내용을 고친 “戊辰譜(무진보) 가짜 족보이다. 자기네 입맛대로 거짓으로 조작해서 팔아먹은 족보이다. 원본이 2012년에 발견되었기에 망정이지 발견되지 않았다면 가짜 무진보가 진짜인양 믿었을 것이 아닌가? 원본에 뚜렷이 함풍이씨 족보라고 되어있지 않은가!
2) 현 함평이씨의 氏族(씨족)의 淵源(연원)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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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이씨 시조 이 언(李 彦)은 고려 태조(918년)때 부원군(府院君)에 봉(封)해졌다고 족보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료에 맞지 않다.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신무위대장군(神武衛大將軍)이란 관직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고려 태조 때는 군봉제가 없었다고 한다. 모두 후대에 지어낸 거짓이라고 본다.
3) 한국인의 뿌리 나의 조상은 누구인가 ? (함평이씨 편 33페이지)
“함평이씨 시조는 고려 광종(950년)때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언(彦)이시다.“ 라고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신호위대장군은 고려 광종 때 없는 관직이며 신호위(神虎衛)는 고려성종(14년) 즉 995년에 창설된 관직이다. 그래서 거짓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시조는 10대손 종생(從生)조라고 기록돼어 있으나 이것 역시(亦是) 잘못된 것이다. 시조의 10대손 종생조는 장양공파(莊襄公派)의 한 파의 중시조는 될 수 있을 지언정 모든 함평이씨의 중시조는 어불성설이고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허무 맹랑한 글이 종친간의 불신과 위화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장양공파 종생조 외에 23명의 11세 파조의 후손들이 엄존(儼存)하고 있는데 어떻게 함평이씨의 중시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장양공파를 제외한 모든 함평이씨에 결례되는 글이다. 이런 글을 쓰거나 방조한 자는 대종회 종무를 보면 안 되는 것이다.
4) 우리의 시조는 누구인가? (성씨총람 함평이씨 편 194페이지)
함평이씨 시조 이 언(李 彦)은 고려 고종(高麗 高宗~1214년)때 신무위대장군으로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고 그의 후손 이광봉(李光逢)은 삼사사(三史司)로 벽상삼한삼중대광 좌명공신(壁上三韓三重大匡 佐命公臣)으로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함평이씨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앞뒤가 안 맞는다.
함풍이씨 시조공 휘 광봉(諱 光逢)조에 대한 기록은 사실이다. 함풍부원군에 봉해졌다고 했으니 처음에 본관을 함풍이씨라고 한 것이다. 1688년 무진보 원본 표지를 보면 뚜렸이 ”咸豐李氏 族譜(함풍이씨족보) 라고 되어 있지 않은가? 이것이 휘 광봉조가 함풍이씨 시조라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나중에 본관을 함평이라 한 것은 세도가인 한 종문에서 몇 백년 앞을 내다보고 목적달성을 하기 위해 바꾼 행위이다. 그 이유는 고려시대는 함평이란 지명이 없었고 함평이씨 시조공 휘 이 언(諱 李 彦)조의 직위. 연대(職位,年代)가 고려시대에는 잊지도 않은 관작이므로 모두 다 거짓으로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함풍이씨(함평이씨) 시조는 부동의 휘 광봉조인 것이다.
나 광범이 위에 찍은 글자 단 한.자 한.획도 더 하지도 안하고 덜 하지도 안하고 여러 문헌(文獻獻)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손까락이 둔한 90대의 늙은이가 또박 또박 찍은 것이오니 시간 나실 때 읽어보시고 혹 모순(矛盾)된 점 있으면 질책(叱責)하시길 바라오며 족친 여러 분의 가정에 만복이 충만하시길 기원 하옵니다.
글/ 광범 (교수공파) 전 서울종친회장, 대종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