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는 나를 밝혀주는 등불
나는 부모로부터 소중한 피를 이어받아 이 땅에 태어나 존재한다. 부모는 또 그 위 할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는 또 그 위 할아버지로부터 피를 이어받아 존재하셨다. 이렇게 상계로 올라가면 이 세상에 나를 존재케 하신 분을 우리는 시조라고 부른다. 그래서 시조 분을 가장 존중하고 은혜에 감사하고 추모의 제를 올려드리는 것이다. 이것을 후손들은 본받고 부모님을 공경하고 존경하는 효심을 가지게 되고 남을 배려하는 전인격적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는 백정이든 노비든 고관대작이든 자기에게 피를 나누어주신 분이시니 그자체로 하늘과 같은 존재이시다. 즉 신분 고하에 상관없이 고귀한 것이다. 남의 눈을 의식하여 조상을 꾸미거나 숨기는 것은 참으로 불효막심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자기의 조상을 숨기고 조상이 아닌 사람을 조상으로 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족보를 만드는 이유는 자기의 조상을 바르게 알고 위업을 계승하고 공경하며 추모하는 것과 같은 혈육을 알아보고 화목하게 잘 살아달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함풍이씨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1688년에 발행된 “함풍이씨족보” 이다. 표지에는 분명하게 “咸豐李氏族譜(함풍이씨족보)”라고 표기되었다.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또 “咸平李氏(함평이씨)“라고 기록되었다. 함풍과 함평은 동명 이칭이며 같은 동족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시조부분에서 잘못되었는바 아래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1) 1688년 무진보 족보에서 가장 중요한 시조를 살펴보자
“一代 (1대)
始祖李彦(시조이언)
高麗光宗朝入官至 (고려광종조입관지)
神武衛大將軍 惑云 府院君(신무위대장군 혹운 부원군)
墓在咸平地(묘재함평지)“ 라고 기록되었다.
(무진보 사진)
가. 시조 이언조를 1대로 하여 10때까지는 代(대) 자를 썼다. 子자를 쓰지 못했다. 子자를 못 쓴 족보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 이언조는 고려 역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다. 고려시대 신무위대장군이라는 관직이 없다는 것이다.
라. ”혹운 부원군“의 기록은 무슨 의미인가? 국어사전에 혹운이란 뜻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의 의미다. 부원군(府院君)은 고려 충렬왕 이후 조선시대까지 사용한 작호(爵號)이다. 부원군에는 관두가 있어야 한다. 관두 없는 부원군은 없다. 함풍부원군, 함평부원군, 기성부원군 처럼 관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해석하자면 이언조를 어떤사람이 부원군이라 했다더라는 뜻인데 아무래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 “혹운 부원군”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나중에 발행한 파보 족보에는 이언조를 “함풍군”이라 고쳤고 최근에는 아예“ 함풍부원군”이라고 까지 쓰기에 이르렀다. 모두 후대에 붙혀진 잘못된 기록이다.
2) 1688년 족보의 별보에 기록된 휘 광봉조를 살펴보자.
“ 李光逢(이광봉)
忠肅王十一年 (충숙왕 11년)
爲三司使佐命功臣 咸豐府院君(위삼사사좌명공신 함풍부원군)
配羅州羅氏西海島觀察使(배 나주나씨 서해도관찰사)“
1) 휘 광봉조는 명확히 “함풍부원군“이라고 기록되었다.
2)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사료에 기록되었다.
3) 군호는 한 성씨에 내려지면 같은 군호가 또 내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이언조가 광봉조 선대라면 그리고 함풍부원군의 군호를 받았다면 광봉조에게 또 다시 함풍부원군이 내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함풍이씨 전체에 함풍부원군은 단 한 분 뿐이시다.
4) 함풍(함평)이씨는 ”함풍부원군“의 군봉에 의해서 함풍(함평)이씨가 성관되었다.
어느 분이 ”함풍부원군“ 이신가? 장양공파에서 발행한 현존 가장 오래된 1688년 무진보에서 함풍부원군은 휘 광봉조라고 명확히 기록하였습니다.
함풍(함평)이씨는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함풍부원군이라는 책봉에 의해서 함풍(함평)이씨가 성관된 것입니다. 함풍부원군은 휘 광봉조 이시고 함풍(함평)이씨 득관조 이신 겁니다. 움직일 수 없는 명확한 증거이며 사료인 것이다.
함평이씨 족보에서 나중에 이언조를 “함풍군”이니 심지어 “함풍부원군“이라고 쓰고 있는데 완전히 후대에 갖다 붙인 허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함풍부원군은 휘 광봉조 단 한분인 것입니다.
3) 함풍이씨(함평이씨) 시조는 휘 광봉조로 밝혀졌다.
이언조에 관한 역사적 근거 자료가 있으면 밝혀주시길 바랍니다. 후손을 선대로 뒤바꿔 기록하거나 자기 부모를 놔두고 엉뚱한 사람을 조상으로 한다면 자기부정 이다. 그야말로 자기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소 말둑에 절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1688년 족보를 살펴보면서 왜 아직도 진실을 앞에 두고 왜면 하는지 ? 무슨 이득이 그리도 많아서 조상을 배반하는지? 진정 언제까지 왜곡으로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훗날 후손들에게 얼굴을 못 들게 할 작정인지? 왠지 함평이씨 대종회 종무담당자 분들이 가련해 보이고 씁쓸한 맛을 자아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요? 자기의 정체성을 밝히고자하는 족보가 자기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족보라면 그 족보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가짜 조상을 모신 족보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족보의 의미는 나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
글/ 길현 (지평공파) 총무국장
족보는 나를 밝혀주는 등불
나는 부모로부터 소중한 피를 이어받아 이 땅에 태어나 존재한다. 부모는 또 그 위 할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는 또 그 위 할아버지로부터 피를 이어받아 존재하셨다. 이렇게 상계로 올라가면 이 세상에 나를 존재케 하신 분을 우리는 시조라고 부른다. 그래서 시조 분을 가장 존중하고 은혜에 감사하고 추모의 제를 올려드리는 것이다. 이것을 후손들은 본받고 부모님을 공경하고 존경하는 효심을 가지게 되고 남을 배려하는 전인격적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는 백정이든 노비든 고관대작이든 자기에게 피를 나누어주신 분이시니 그자체로 하늘과 같은 존재이시다. 즉 신분 고하에 상관없이 고귀한 것이다. 남의 눈을 의식하여 조상을 꾸미거나 숨기는 것은 참으로 불효막심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자기의 조상을 숨기고 조상이 아닌 사람을 조상으로 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족보를 만드는 이유는 자기의 조상을 바르게 알고 위업을 계승하고 공경하며 추모하는 것과 같은 혈육을 알아보고 화목하게 잘 살아달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함풍이씨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1688년에 발행된 “함풍이씨족보” 이다. 표지에는 분명하게 “咸豐李氏族譜(함풍이씨족보)”라고 표기되었다.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또 “咸平李氏(함평이씨)“라고 기록되었다. 함풍과 함평은 동명 이칭이며 같은 동족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시조부분에서 잘못되었는바 아래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1) 1688년 무진보 족보에서 가장 중요한 시조를 살펴보자
“一代 (1대)
始祖李彦(시조이언)
高麗光宗朝入官至 (고려광종조입관지)
神武衛大將軍 惑云 府院君(신무위대장군 혹운 부원군)
墓在咸平地(묘재함평지)“ 라고 기록되었다.
(무진보 사진)
가. 시조 이언조를 1대로 하여 10때까지는 代(대) 자를 썼다. 子자를 쓰지 못했다. 子자를 못 쓴 족보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 이언조는 고려 역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다. 고려시대 신무위대장군이라는 관직이 없다는 것이다.
라. ”혹운 부원군“의 기록은 무슨 의미인가? 국어사전에 혹운이란 뜻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의 의미다. 부원군(府院君)은 고려 충렬왕 이후 조선시대까지 사용한 작호(爵號)이다. 부원군에는 관두가 있어야 한다. 관두 없는 부원군은 없다. 함풍부원군, 함평부원군, 기성부원군 처럼 관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해석하자면 이언조를 어떤사람이 부원군이라 했다더라는 뜻인데 아무래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 “혹운 부원군”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나중에 발행한 파보 족보에는 이언조를 “함풍군”이라 고쳤고 최근에는 아예“ 함풍부원군”이라고 까지 쓰기에 이르렀다. 모두 후대에 붙혀진 잘못된 기록이다.
2) 1688년 족보의 별보에 기록된 휘 광봉조를 살펴보자.
“ 李光逢(이광봉)
忠肅王十一年 (충숙왕 11년)
爲三司使佐命功臣 咸豐府院君(위삼사사좌명공신 함풍부원군)
配羅州羅氏西海島觀察使(배 나주나씨 서해도관찰사)“
1) 휘 광봉조는 명확히 “함풍부원군“이라고 기록되었다.
2)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사료에 기록되었다.
3) 군호는 한 성씨에 내려지면 같은 군호가 또 내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이언조가 광봉조 선대라면 그리고 함풍부원군의 군호를 받았다면 광봉조에게 또 다시 함풍부원군이 내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함풍이씨 전체에 함풍부원군은 단 한 분 뿐이시다.
4) 함풍(함평)이씨는 ”함풍부원군“의 군봉에 의해서 함풍(함평)이씨가 성관되었다.
어느 분이 ”함풍부원군“ 이신가? 장양공파에서 발행한 현존 가장 오래된 1688년 무진보에서 함풍부원군은 휘 광봉조라고 명확히 기록하였습니다.
함풍(함평)이씨는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함풍부원군이라는 책봉에 의해서 함풍(함평)이씨가 성관된 것입니다. 함풍부원군은 휘 광봉조 이시고 함풍(함평)이씨 득관조 이신 겁니다. 움직일 수 없는 명확한 증거이며 사료인 것이다.
함평이씨 족보에서 나중에 이언조를 “함풍군”이니 심지어 “함풍부원군“이라고 쓰고 있는데 완전히 후대에 갖다 붙인 허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함풍부원군은 휘 광봉조 단 한분인 것입니다.
3) 함풍이씨(함평이씨) 시조는 휘 광봉조로 밝혀졌다.
이언조에 관한 역사적 근거 자료가 있으면 밝혀주시길 바랍니다. 후손을 선대로 뒤바꿔 기록하거나 자기 부모를 놔두고 엉뚱한 사람을 조상으로 한다면 자기부정 이다. 그야말로 자기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소 말둑에 절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1688년 족보를 살펴보면서 왜 아직도 진실을 앞에 두고 왜면 하는지 ? 무슨 이득이 그리도 많아서 조상을 배반하는지? 진정 언제까지 왜곡으로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훗날 후손들에게 얼굴을 못 들게 할 작정인지? 왠지 함평이씨 대종회 종무담당자 분들이 가련해 보이고 씁쓸한 맛을 자아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요? 자기의 정체성을 밝히고자하는 족보가 자기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족보라면 그 족보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가짜 조상을 모신 족보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족보의 의미는 나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
글/ 길현 (지평공파) 총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