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곡공파 도곡공 휘 유(瑜)조 조명

이길현
2025-01-12
조회수 861

낭곡공파 도곡공 휘 유(瑜)조 조명

 

가. 낭곡공파 세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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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유(李瑜)조 문중

 

함풍이씨 도곡공 이유와 부인 부령 김씨의 혼인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도곡 이유의 생부 죽곡공 이장영(1521~1589) 프로필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조선전기 함양군수, 대사간, 양양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라고 하였다. 부인 부령 김씨의 조부 김서성(1497~1548) 프로필은 위의 사전에  ‘호조-예조-형조 정랑과 집의(사헌부 소속 종3품), 사재감정(정3품)’을 지냈다고 했다. 부령 김씨의 아버지는 장수 현감을 지낸 분이다. 두 집안은 공히 중앙 관직에서 상당한 요직을 거친 좋은 가문이기에 후손들이 혼인을 맺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타루비에 의하면 부인 부령 김씨의 아버지 현감 김수복은 사위 도곡 이유를 위해 부안군 상서면 통정리 도화동에 강당을 마련해 주고 문하생들을 가르치도록 후원했다고 했다. 처사 도곡 이유는 1597년 9월 19일 청등벌에 쳐들어온 왜적을 막기 위해 의병들을 모집하여 전투하던 중 적의 흉탄에 맞아 순절하였으며, 부인 부령김씨도 남편의 뜻을 받들어 적진에 돌진하여 한날한시에 순절했다. 왜적들은 도화동 집까지 쳐들어와 불 지르고 물건들을 약탈해 갔다.

 

도화동에는 남겨진 자식들 3남 2녀가 있었다.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편월마을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둘째 아들 홍의는 함평 노씨와 혼인하였으며 이후 자손들은 고창군 성내면 옥제리 월봉 마을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회당 홍의의 묘는 고창군 성내면 월봉 마을에 모셔져 있고, 부인 함평 노씨는 부안군 줄포면 대동 마을에 모셔져 있다.

 

도곡 이유 부부가 자식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던 부안군 상서면 통정리 도화동에는 도곡 이유 부부 묘와 도곡공이 양자로 간 아버지 낭곡 이억영 묘소가 있다.  이후 1995년 후손 李載洙(전 농협 고창군지회장)가 유허비를 세웠으며, 매년 9월 19일 도화동에서 시제를 지내고 있다. 부안향토문화지(1980년 변산문화협회 발행) 113쪽에는 ‘후손들이 도곡 이유와 낭곡 이억영 두 분을 모시는 경의재를 1979년 11월에 세웠다’는 기록과 ‘고창군 성내면에 후손들이 있다’는 상세한 기록이 있다.

 

한편 1597년 부안 현감이 도망간 자리를 의병들이 죽음으로 왜적을 막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순절한 부안 의병들에 대한 예우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냉냉했다. 고창군 흥덕면에는 남당회맹단 봉분과 위패를 모신 모충사가 있지만, 부안군에는 1597년 9월 왜적을 막기 위해 싸우다 장렬히 숨진 부안 출신 일천여명 의병들에 대한 묘소나 위패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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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곡 이억영 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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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곡 이유 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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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루비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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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루비 안내판

 

 

다. 정유재란(1597년)과 의병장 도곡공 이유(李瑜)

 

정유재란(1597년) 당시 부안군 상서면 청등벌에서 왜적을 물리치다 순절한 의병장 도곡공 이유와 부인 부안김씨! 나라와 백성을 지키다 한날한시에 순절한 부부를 잊지 않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타루비(墮淚碑)를 세웠다. 

 

타루비(墮淚碑) 비문은 독립운동가 장택 고예진(1875~1952)이 썼고, 1953년 간재(艮齋) 전우(田愚:성리학자1841~1922)선생의 문인인 양재 권순명, 현곡 유영선, 유재 송기면, 후창 김택술 등이 도곡 비문을 지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타루비(墮淚碑)는 훼손되고 사람들로부터 잊혀지기 시작했다. 후손들은 부안군 상서면 만화동 선산에 낭곡공과 도곡공의 비석을 세웠고 마을 입구에는 경의재(景義齋)와 유허비를 세웠다. 그런데 일부 역사 관련 종사자들이 함풍이씨 문중 재실 경의재(景義齋)를 수원 백씨 문중 재실이라고 기록하는 등 있어서는안 될 일도 발생했다.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타루비는 1981년 변산문화협회 백주 김태수 선생이 주도해서 설립했다. 그러나 정유재란 당시 의병 146위를 모신 민충사(2009년 준공)에 도곡 이유와 부인 부안김씨, 유희방, 김홍원, 채춘봉, 권대붕 등 여섯 분은 빠져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이 2020년 부안군의회 행정사무감사에서 김정기 의원에 의해 지적되면서, 2022년 4월 23일 다섯 분에 대한 위패가 봉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도곡 이유의 부인이신 부안(부령)김씨 할머님도 여성이지만 위패가 봉안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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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안된 위패 ) ( 월봉마을)


간재(艮齋) 문인 현곡 유영선은 도곡공 유허비에 ‘남편은 忠에 죽고, 妻는 烈에 죽으니’라는 글로 1597년 청등벌 전투에서 순절한 도곡 선생 부부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적었다.

2022년 새해, 후손들은 민충사에 모셔진 의병장 도곡 이유를 찾았다. 425년 만에 제대로 된 공적을 인정받았다는 기쁨에 앞서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정유재란 당시 선조의 역사에 대하여 후손들의 불민했음을 민망해하며 가슴 아파했다. 후손 이재문 씨는 "위패봉안을 위해 애써주신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고맙다"라는 말을 전하며, "나라가 위급할 때 목숨 바쳐 지킨 우리의 선조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라. 도곡공 이유(李瑜) 조 후손들

 

1597년 9월 부안군 상서면 청등벌 전투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순절한 도곡 이유 선생 후손들은 부안군 백산, 줄포, 고창군 흥덕과 성내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도곡 이유의 생부 죽곡 이장영은 대사간을 지냈으며, 부인 부령 김씨 집안도 祖父 대사간, 父 장수현감을 지낸 명문 집안이다. 최영성 교수 논문에는 간재 문인들 중에 도곡 후손들이 포함되어 있다. 400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까지도 도곡 이유 선생의 흔적은 부안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부안읍에서 줄포 방면 국도 23번 도로를 지나가다 보면 상서면 감교리에  타루비가 서 있다. 글씨는 대한민국 서예를 대표하는 강암 송성룡 선생이 쓰고, 글은 변산문화협회장 백주 김태수 선생이 지었다.

 

도곡실기(桃谷實記)에 실려 있는 타루비문은 1951년 항일운동가 송천 고예진이 썼다. 타루비 본문은 2015년 발간 부안군지 4권(863페이지)에 나온다. 부안군지에는 ‘장택 고예진’으로 나오는데 전남 장흥의 옛 지명이  장택이라서 장택을 호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송천선생과 장택선생은 같은 분이시다.


참고로, 부안군청 민원실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 묵죽화(墨竹畵)는 중봉 이가범(李可範) 선생 작품으로 중봉선생은 백산면 출신이다. 중봉의 아버지 道峰 李敬煥은 간재 문인으로 오재 이창환과 사촌이 된다. 오재(梧齋) 이창환(李昌煥)은 오재유고(梧齋遺稿) 또는 오재집(梧齋集)을 남겼다.

 

오재 이창환과 양재 권순명은 처남매부가 된다. 특히 양재 권순명은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에서 태어나 18세부터 간재 선생 제자가 되어 왕등도, 신시도, 계화도에서 함께 생활을 한 특별한 제자였다.

 

간재 사후에 양재 권순명權純命은 고향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에 면학당(계화도 시절 면학당)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했다. 이때 직봉 이재두, 중봉 이가범 등이 수학하게 된다. 최영성 교수 논문에는 ‘부안의 신소재(愼小齋) 이윤환(李潤煥), 취헌(醉軒) 이안범(李顔範), 직봉(直峯) 이재두(李載斗) 삼대가 간재 학통을 잇고 문집을 낸 경우이다’라고 소개하는데 세분 모두 도곡 선생 후손이다.

 

고창군 성내면 월봉 마을에는 도곡 선생의 둘째 아들 悔堂官 홍의(弘誼 자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도곡 이유 11세손 취헌 이안범의 장남과 유재 송기면(송하진의 조부)의 딸이 혼인하여 월봉 마을에서 살았다. 모두 간재 문인이다.

 

도곡공 후손들은 간재를 고창 성내 월봉 마을까지 초빙하여 충절 정신 함양과 유학 강습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한편 부안군 상서면 통정리 도화동에는 도곡 이유 부부와 아버지 낭곡 이억영 묘와 유허비와 재실이 있다. 줄포 대동리에는 도곡 선생의 첫째 아들 부부와 둘째 며느리 묘가 있다.

 

 

 

글.사진 /편집 정리 / 이정수 수석부회장/ 낭곡공파

참고자료 : 부안인터넷 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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