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군 휘 극해(克諧)의 6세손 이광선(李光先)장군 일대기
1) 세계도

6세 玄雨/현우
7세 自寶/자보
8세 克諧/극해 (함성군)


함성군 이극해(李克諧)의 6세손 임란선무원종공신 이광선(李光先)장군 충의비
이광선(李光先)장군 충의비 전경
2) 문촌공(文村公) 이광선(李光先) 장군의 생애
가) 壬亂宣武原從功臣兵曹參判 咸豊李公光先將軍忠義碑
•소 재 지 :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 342
•주조(主祖) : 이광선(李光先) 자(字):여효(汝孝), 호(號):문촌(文村), 무과(武科) 절충장군 (折衝將軍) 임란공신(壬亂功臣), 병조참판(兵曹參判)
•생졸 : 1563(明宗癸亥) ~1616(光海丙辰) (54세)
•연혁(沿革) : 2001년 13세손 재향(載香)이 주간(主幹) 선조의 업적(業績)을 발굴정리(發 掘整理)하여 충의비(忠義碑) 건립추진위원회(建立推進委員會)에서 수립(竪立)
•약사(略史) :
① 1591년 무과급제 신묘별시문무과방목 등재(辛卯別試文武科旁目 登載)
② 1592년 4월 13일 경복궁(景福宮) 들어가 선조(宣祖)호위(護衛)부장(部將)
③ 1592년 6월 22일 선조(宣祖)를 호위하고 의주(義州)로 몽진(蒙塵) 호종(扈從)
④ 1592년 6월 22일 선조대왕(宣祖大王) 의주(義州)에 이르러 광선(光先)에게 선전관(宣 傳官) 제수(除授).
⓹ 1592년 7월 8일 권율장군 막하에 들어가 1,500명의 군사와 함께 이치(梨峙) 전투에 서 왜구(倭寇) 격퇴.
⓺ 1593년 2월 22일 권율장군 막하에서 정병(精兵) 2,300명이 행주전투(幸州戰鬪)에서 왜군(倭軍) 3만대군 격퇴(擊退).
⓻ 1599년 선략장군(宣略將軍), 소위장군(昭威將軍), 보공장군(保功將軍)
⓼ 1601년 건공장군(建功將軍), 소강진수군첨절제사(所江鎭水軍僉節制使)
⓽ 1602년 6월 戰功(전공)으로 행주대첩비에 기각(記刻).
⓾ 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책훈(策勳) 공신녹권(功臣錄券) 사급(賜給),
병조참판 贈.
⑪ 1609년 사직(辭職)후 나주고을 개선장군(凱旋將軍)하시다.
⑫ 1616년 8월 7일 향년 54세를 一期로 종고(終考)하시다.
⑬ 1902년 이치대첩비(梨峙大捷碑)에 기각(記刻).
⑭ 2001년 9월 7일 교지(敎旨)4점 및 공신녹권(功臣錄券)을 광주시 민속박물관(民俗博 物館)에 기탁보존(寄託保存)
⑮ 2001년 12월 13세손 載香 主幹(주간)하에 충의비(忠義碑) 건립추진위원회(建立推進 委員會)에서 비(碑)를 세우다.
⑯ 2002년 13세손 재향(載香) 主幹(주간) 문촌회관 건립
⑰ 2004년 13세손 재향(載香) 主幹(주간) 문촌회관 前 추모비(追慕碑) 수립
나) 임란공신(壬亂功臣) 이광선(李光先)장군 충의비(忠義碑) 개요(槪要)
㉠ 壬亂宣武原從功臣兵曹參判 咸豊李公光先將軍忠義碑
① 위치(位置) :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 342
② 수립(竪立) : 2001년 12월 2일
③ 찬자(撰者) : 함풍이씨 광주종친회장 계선
④ 규모(規模) : 비신높이 245㎝, 폭 85㎝ , 두께 55㎝ , 용갓 높이 107㎝ ,
거북좌대 높이 98㎝ , 총 높이 450㎝
㉡ 壬亂宣武原從功臣 李光先將軍忠義碑文
公의 諱는 光先(광선)이며 字(자)는 汝孝(여효)이고 號(호)는 文村(문촌)이며 本貫(본관)은 함풍(咸豐)이다. 始祖 咸豊府院君(함풍부원군) 光逢(광봉)의 11세손이며 咸城君(함성군) 諱 克諧(극해)의 6세손이다. 1563년 羅州 증문리에서 參奉(참봉) 夢楨(몽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幼年時節 莎村(사촌) 崔四勿(최사물)의 門下에서 經史(경사)를 통달하여 學問이 뛰어나셨으며 元來(원래) 性品(성품)은 忠直(충직)하고 義로우며 文武(문무)의 才能(재능)을 兼備(겸비)하여 勇力(용력)이 絶倫(절윤)하고 智略(지략)이 蓋世(개세)하여 세상 사람들이 公輔(공보)의 器局(기국)이 있음을 重(중)히 여겼다.
1591년 10월 武科(무과)及第(급제)하여 신묘별시무과방목에 오르시고 1592년 4월 13일 倭寇(왜구)의 侵犯(침범)으로 釜山(부산) 東萊(동래) 尙州(상주) 忠州(충주)가 연달아 陷落(함락)되고 전국 방방곡곡이 倭軍(왜군)에게 蹂躪(유린)되어 임금이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으니 참으로 痛歎(통탄)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將軍이 말씀하시기를 臣下는 마땅히 나라를 위해 忠誠(충성)을 다하여야 한다 하시고 즉시 景福宮(경복궁)에 들어가 宣祖(선조)의 特命(특명)을 받아 部將으로 1592년 4월 30일 임금을 호위하고 景福宮(경복궁)을 떠나 1592년 6월 22일 義州에 이르니 宣祖(선조)께서 嘉尙(가상)히 여기시고 특별히 宣傳官(선전관)을 除授(제수)하고 長劒(장검)과 수례를 下賜(하사)하셨다.
그 뒤 三南地方이 倭軍에 의해 不通되고 있다는 行朝(행조)의 命을 받고 왜군의 行惡(행악)에 悲憤慷慨(비분강개)하여 單騎(단기)로 東萊(동래)에 달려가 왜군의 包圍網(포위망)을 뚫고 적의 목 數十首(수십수)를 베고 곧바로 湖南倡義軍陣(호남창의군진)에 달려가 高因厚(고인후), 魯認(노인), 李忠立(이충립)과 적을 討伐(토벌)할 것을 謀議(모의)하고 즉시 權慄將軍(권율장군)과 協謀(협모)하여 1592년 7월 8일 1,500명의 군사로 梨峙(이치)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진산에 駐屯(주둔)한 왜군이 全州로 쳐들어옴에 梨峙에서 抗戰(항전)하여 왜군을 擊退(격퇴) 시키는데 큰 功(공)을 세웠다. 그리고 1593년 2월 12일 權慄將軍(권율장군)과 함께 精兵(정병) 2,300명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幸州山城(행주산성)을 들어와 토성을 쌓고 木柵(목책)을 치고 있을 때 평안도 황해도로부터 後退(후퇴)한 倭軍(왜군) 三萬大軍이 이날 새벽 총출동하여 幸州山城을 包圍(포위)하고 셋으로 나뉘어 교대하며 공격해 왔으나 워낙 山城이 높고 가파르며 我軍(아군)이 高地帶(고지대)에서 활과 총통을 쏘고 돌을 던졌기 때문에 쉽게 치고 올라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두울 무렵 일부 왜군이 방위가 若干(약간) 허술한 쪽으로 악착같이 달려들어 北쪽 낮은 성의 木柵(목책) 한 칸을 破壞(파괴)하고 쳐들어왔으며 그곳을 지키던 승려군이 동요되려하자 權慄將軍(권율장군)이 칼을 뽑아들고 여러 將軍을 호령하니 將兵들은 앞을 다투어 칼을 휘두르며 肉薄戰(육박전)을 敢行(감행)하였다. 이에 全軍이 죽음을 무릅쓰고 民官軍이 일치 團結(단결)하여 승병 婦女子(부녀자)까지 가담한 朝鮮軍(조선군)이 決死抗戰(결사항전) 함으로써 마침내 이를 물리치고 倭軍(왜군)은 크게 패하여 네 곳에 戰死者(전사자)의 시체를 모아서 태우고 달아났다.
朝鮮軍(조선군)이 그 나머지의 敵軍(적군)을 베인 것도 130首(수)에 달하였고 倭軍(왜군)이 버린 깃발, 투구, 갑옷, 무기 등을 얻은 것이 또한 많다하니 실로 큰 戰果(전과)라고 아니할 수 없으며 2,300명의 작은 軍隊(군대)로 三萬의 왜군을 擊退(격퇴)하여 왜군은 一萬여명의 死傷者(사상자)와 무기 727점을 버려둔 채 退却(퇴각) 하였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我軍(아군)과 明軍의 사기가 일어나 차차 왜군을 남으로 退却(퇴각) 시키고 다행히 政府(정부)가 還都(환도)하게 되었으니 그 意義는 실로 크다 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幸州大捷(행주대첩)에서 武功(무공)을 세운 事實(사실)을 宣祖(선조)께서 들으시고 매우 기뻐하시면서 나라가 어려울 때 공을 세운 士大夫(사대부)를 비롯하여 庶民(서민)이나 賤民(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團結(단결)하여 百尺竿頭(백척간두)에 선 祖國(조국)을 구한 것은 臣下(신하)의 뛰어난 功勳(공훈)이요 功이 있는 者에게는 상을 내리는 것이 나라의 떳떳한 道理이다 하시고 宣略將軍(선략장군), 昭威將軍(소위장군), 保功將軍(보공장군)으로 除授(제수)하여 1599년 敎旨(교지)를 내리시고 1601년 建功將軍(건공장군) 所江鎭水軍僉節制使(소강진수군첨절제사)로 除授하여 敎旨(교지)를 내리시니 나라를 위하여 忠誠(충성)을 다하였다.
壬亂勃發(임란발발)후 13년이 지난 1605년 다행히 朝廷(조정)이 평온을 찾자 그날의 武功(무공)을 가려 宣武原從功臣錄券(선무원종공신녹권)을 내리시고 宣祖께서는 將軍의 찬란한 業績(업적)에 感動(감동)하여 超拜兵曹參判(초배병조참판)을 증하셨으며 1609년 官職(관직)을 마치고 歸鄕(귀향)하셨으나 지난날 倭寇(왜구)의 侵略(침략)을 千秋(천추)의 恨(한)으로 여겨오던 중 1616년 8월 7일 54歲를 一期(일기)로 終命(종명)하셨다. 그러나 그 行績(행적)은 1602년 6월 일찍이 幸州大捷碑(행주대첩비)에 등재되었고 1964년 梨峙大捷碑(이치대첩비)에 등재되었으며 그 이름이 軍部에 記錄(기록)되고 壬亂忠義史錄 等(임란충의사록 등) 그 名聲(명성)과 德望(덕망)을 推仰(추앙)하여 보령호국사 금산 금곡사에 配享(배향)되었고 그 아름다운 敎旨(교지)와 錄券(녹권)은 400여 년 동안 대대로 이어 精誠(정성)을 다하여 保存하였으나 그동안 낡고 褪色(퇴색)되어 管理에 만전을 기하고자 2001년 9월 7일 光州市立民俗博物館(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寄託管理(기탁관리)하고 있다.
이제 將軍이 돌아가신지 385년이 지난 오늘 將軍의 13世孫 載香(재향)의 誠力(성력)으로 숨겨진 實記(실기)를 根據(근거)하여 그 거룩한 얼을 子孫萬代(자손만대)에 기리고자 鄕土民(향토민)들이 將軍의 救國哀情(구국애정)을 기리는 忠義碑建立推進委員會(충의비건립추진위원회)를 構成(구성)하여 後孫(후손)들의 뜻을 모아 救國決戰(구국결전)에 참여한 숭고한 愛國精神(애국정신)을 널리 선양하여 우리와 後孫에게 나라를 스스로 지키는 自主精神(자주정신)을 길이 繼承(계승)하고자 한다.
西紀 2001年 12月 日
傍孫 咸豊李氏光州宗親會長 啓善 謹撰 晉州人 姜炯埰 謹書
㉢ 忠義碑竪立推進委員(충의비수립추진위원)
委員長 : 崔炳喆 (나주시 제2 건국위원장)
委 員 : 崔仁基(전행자부장관), 金大棟(나주시장), 丁埰玉(나주경찰서장), 裵根鎬(나주시교육장), 崔甲柱(나주시의정동우회장), 崔玟奎(전대성여고교장), 丁潤國(향토사학자), 鄭濟甲(나주향교유도회장), 梁海燮(대한시우회지회장), 林東烈(전다시면 노인회장), 李民寬(향토문화연구원장), 韓斗鉉(나주시노인회장), 盧涏(동산공장사장), 安鍾鉉(다시면노인회장), 林元澤(나주향교전교), 崔榮五(전다시중학교장학회이사), 柳基相(고흥유씨나주종중대표), 鄭判會(전다시면장), 朱東植(나주시지편찬위원), 朴祥雨(행정동우회회장), 李連洙(광주시립민속박물관장), 文章浩(의재문화재단연진회회장), 李明憲(서울종친회장), 李啓春(대종회부회장), 李載鶴(대한노인회전납협의회장), 李載根(전대종회장,전국회의원), 李敏燮(여주종친회장), 李敦禹(고창군의회의장), 李啓勉(여주종친회장), 李栽賢(무안군수), 李啓長(김포부시장), 李光男 (추진위원간사)
㉣ 忠義碑竪立記 (충의비수립기)
宣祖(선조) 25년(1592) 壬辰年 倭寇(왜구)의 侵略(침략)으로 百尺竿頭(백척간두)에 선 민족의 運命(운명)을 구하고자 先民(선민)들이 大同團結(대동단결)하여 祖國(조국)을 지킨 참뜻을 기리고 잊혀지는 壬亂勝戰(임란승전)의 영광을 재현하고 조상의 찬란한 業績(업적)을 대대로 이어 傳(전)하고자 壬亂功臣(임란공신) 李光先將軍(이광선장군)의 功勳(공훈)을 기리고 빛내기 위하여 지역 유지들이 忠義碑竪立推進委員會(충의비수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記刻(기각)된 후손들의 誠金(성금)과 文村公門中(문촌공문중)의 財源(재원)으로 여기에 祖上(조상)의 거룩한 얼이 담긴 史蹟碑(사적비)를 세워 文化遺蹟(문화유적)으로 유지 保存하여 역사의 산 敎育場(교육장)으로 子孫萬代(자손만대)에 길이 전할 것이며 올바른 歷史觀(역사관)을 정립하고 民族正氣(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데 있어서도 중대한 敎訓(교훈)이 될 것이다. 또한 이 史蹟(사적)은 지역에 국한된 遺跡(유적)이 아니라 壬亂功臣(임란공신) 李光先 將軍(이광선 장군)에 대한 올바른 歷史(역사)적 認識(인식)으로 이를 길이 전하여 잊혀 지지 않는 史蹟(사적)으로 역할을 다할 것이다.
西紀 2001年 12月 日
忠義碑竪立推進執行委員會(충의비수립추진집행위원회)
文村公門會長 載厚(문촌공문회장 재후)
總務 載香, 財務 春載, 監事 載熙
※ 參考文獻(참고문헌)
·宣武原從功臣錄券(선무원종공신녹권), 敎旨(교지), 宣祖實錄(선조실록), 幸州大捷碑(행주대첩비), 梨峙大捷碑(이치대첩비), 湖南節義錄(호남절의록), 錦城三綱錄(금성삼강록), 晩翠堂實紀壬亂參佐諸公錄(만취당실기임란참좌제공록), 忠壯公權慄將軍實記(충장공권율장군실기), 金谷祠誌(금곡사지), 壬亂功臣遺史誌(임란공신유사지), 壬亂史料集(임란사료집), 壬亂忠義史錄(임란충의사록), 羅州郡人物誌(나주군인물지), 全南道誌(전남도지), 외 多數
3) 무과 급제 /신묘별시문무과방목/선조24년(1591) 10월
(출처/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 소장)


2쪽 4쪽 李光先(이광선)
武科(무과)乙科(을과)15위(16/300)
4) 李光先 將軍 敎旨(이광선 장군 교지)
이광선
선략장군훈련원첨정
사령일 : 선조32년(1599) 7. 7.

이광선 소위장군훈련원첨정무신겸선전관
사령일 : 선조32년(1599) 8. 21.

이광선 보공장군훈련원첨정무신겸선전관
사령일 : 선조32년(1599)9. 28.

이광선
건공장군소강진수군첨절제사
사령일 : 선조34년(1601) 7. 5.
5) 선무원종공신녹권 부장 이광선(李光先)
·宣武原從功臣錄券
部將 李光先

(원문)
宣武原從功臣錄券
部將李光先
萬曆三十三年四月十六日 行都承旨臣申欽 敬奉
傳旨 國多難而靡定爾既宣力於 中興功無微而不酬
予乃推恩於 原從誕擧新典式遵舊 章言念南寇之
陸梁致有西土之播越縱橫豺虎慘見
宗社之蒙塵跋涉山川忍說君臣 之中露天 欲興唐而
父母拯己人猶戴晋而大小忘勞身幸戡亂而回鑾遂策
勳 而銘鼎 惟爾卿士大夫曁士庶人或揚我武烈或
助我軍需 執殳驅馳 或有捐軀之士提兵戰伐或有
獻馘之徒 悉錄於兹未傳於後 惟輕惟重分一時之
功勞 爾子爾孫享萬世之安樂 故玆敎示想宜知悉
선무원종공신녹권 [국역] 부장 이광선
1605년(선조 38) 4월 16일 행도승지 신흠은 경건히 왕명을 받들다.
나라가 매우 어지럽고 쓰러지려 할 때에 모두들 힘을 합쳐 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니 돌이켜 보건대 옛 어진 제도와 문물을 본받아 새 법을 만들어 이들을 원종공신으로 녹훈토록 한다. 남쪽에 있는 왜구의 도둑떼들이(남침) 분탕질을 하여 임금은 도성을 버리고 떠나갔으며 미친 호랑이와 늑대들이 전국을 누비며 약탈을 진행하니 이는 참혹한 광경이었다.
종묘사직과 임금은 피난길(蒙塵)에 올라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군신(君臣)들은 야외에서 밤을 새웠으며 부모님을 받들 듯 죽음을 가리지 아니하고 앞을 헤쳐 나아갔다.
다행이 왜란이 평정되어 어가가 환궁하게 되었으니 이에 공을 세운 사대부를 비롯하여 서인이나 천민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공적을 들추어 새기(정명:鼎銘) 도록 하라. 무공을 세웠거나 군수품(軍需品)을 지키고 옮기는데 도움을 주었거나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적을 무찔러 도둑의 목을 베워왔거나 그밖에 많은 공을 세운 사람들을 가려내어 책훈토록 하라. 그리고 그 공을 후세에 이어받아 영원히 전하며 그들의 아들들과 손자들이 오래도록 행복과 영광을 누려야 하겠기에 이를 교시(敎示)하여 널리 알리도록 하여라.
·宣武原從功臣錄券 賜給
部將 李光先

(원문)
萬曆三十三年四月十六日 行都承旨 臣申欽 敬奉
傳旨 宣武原從功臣一等乙良 各加一資 子孫承蔭宥
及後世父母封爵 二等乙良 各加一資 子孫承蔭宥
及後世子孫中 從自願加散官一資 其中 無子孫者
兄弟壻姪中 從自願加散官一資 三等乙良 各加一
資 子孫承蔭宥及 後世爲乎矣 各等通訓以上乙良
子孫 兄弟甥姪女婿中一人 從自願加散官一資 物
故人乙良 各依本等施行爲旀 各追贈一資爲齊 犯
罪作散人乙良 並於本品叙用 爲齊 永不叙用人乙
良 許通仕路爲齊 職牒收取人乙良 幷只還給爲齊
妾子乙良 限品安徐爲齊 公私賤口乙良 並只免賤
爲齊 係干逆黨及因逆賊公事間事被罪者乙良 官
爵一款 擧行安徐爲只爲下 吏曺爲良如敎
선무원종공신녹권 사급 부장 이광선 [국역]
1605년(선조 38) 4월 16일 행도승지 신흠 삼가 받들다.
상벌에 관한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전한다.(傳旨)
선무원종공신 1등은 각자 품계를 한 등급씩 높여주고 그의 자손들은 조상의 음덕을 이어받게 하고 부모에게는 봉작을 주라. 2등은 각자 품계를 한 등급씩 높여주며 음덕으로 후손에게는 직무가 없는 벼슬(散官)을 주어 후손들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며 만약 자손이 없는 자에게는 형제나 조카 생질 중에서 직책 없는 벼슬자리를 주라. 3등은 각자 품계를 한 등급씩 높여주며 자손들에게는 훌륭한 선조의 공적을 후세에 잇게 하라. 그리고 각 등급의 통정대부(정3품) 이상의 자손, 형제, 생질, 사위 중 한 사람을 골라 한직을 주어 공을 잇게 하며 고인(故人)은 본 법에 의하여 시행토록 하며(위작) 품계를 한 등급 높여 추증토록 하라.
죄를 짓고 면제되어서도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散人)은 다시 임용(敍用)토록 하며 영원히 재 등용할 수 없는 사람은 벼슬길(仕路)에 나아가도록 허락해 주라. 직첩(벼슬 임명장)을 회수당한 사람은 다시 반환해 줄 것이며, 첩의 자식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구제해 주고,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종(賤口)으로 부리고 있는 사람은 다만 종의 신분을 면제해주게 하라. 역당과 역적으로 인하여 죄를 저지른 사람은 벼슬자리를 마련하여 서서히 쓰도록 하게하고 이조로 하여금 시행토록 하라.
6) 石串亭 榮山江第一景 羅州 第一亭(석관정 영산강 제1경 나주제1정)
咸城君 諱 克諧 曾孫 諱 盡忠(진충)이 1530년 창건.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844번지
영산강과 고막원천이 합류되는 경관이 화려한 절승지에 위치하고 있다.

2001.10.21.촬영 재향
石串亭(석관정)

석관정 연혁비
⋅석관정 연혁비(石串亭 沿革碑)
咸豊李氏 縣監公 石串 盡忠이 武科及第하여 新寧縣監을 歷任한후 歸鄕하여 榮山江과 古幕江이 合流되는 석관정 나루터 江上에 솟은 絶壁 위 景觀이 秀麗한 絶勝地에 1530年 中宗25年 亭子를 創建하여 石串이라 亭題하고 後孫의 講學과 逍遙自適 하시며 晩年의 休養地로 지낸 곳이다.
曾孫 壬亂宣武原從功臣 李光先將軍이 少時에 經史를 通達하고 浩然之氣를 鍊磨하며 亭記와 題詠詩를 남겼는데 丁酉再亂의 倭侵으로 廢墟가 되자 後孫들이 두 차례 손질을 하였고 1755年 英祖31年 7世孫 揚武原從功臣 參判 時昌이 草家 두어 간을 세웠으나 風雨로 老朽되어 1906年 13世孫 春憲이 財産을 出捐하여 12世孫 敦鶴 13世孫 穆憲 壽憲 時憲 帝憲이 協力하여 重建하였고 1937年 돌을 깎아 기둥을 세우고 시멘트를 발라 마루를 만들 때 처음부터 끝까지 勞力한분은 13世孫 黙憲 14世孫 啓林 啓鴻 啓明이며 기와를 덮을 때 食糧全部를 啓萬이 自擔하여 栢文諸宗의 協力으로 完工하니 이 事實을 13世孫 光憲이 重修記에 敍述하여 現存하였고 1990年 12世孫 敦明이 後孫들의 뜻을 모아 重修 推進중 作故하자 15世孫 英範과 16世孫 光男이 推進委員會를 構成하여 諸宗의 追慕하는 精誠과 誠金으로 1998年 前과 같이 正面二間 側面二間 石造 八作골기와 지붕으로 重建하여 代代로 이어온 祖上의 거룩한 얼이 담긴 이 遺蹟을 永久保存하여 子孫萬代 傳授할 것이다.
西紀 2002年 9月 日 / 16世孫 載香 考證 記錄하다.
중건추진위원회
위 원 장 : 영범 위 원 : 길범 /재후 /승범
부위원장 : 문석 재량 /재신 /계옥
총 무 : 광남 병재 /재규 /창범
재송 /재덕
2020. 6 /종손 載春 子 炳昶(行) 수립
7) 문촌공(文村公) 이광선(李光先)將軍의 後孫 根憲, 載春 之墓 전경

(표지석 문장 내용)
가. 동백 함풍 이공 근헌 자는 춘
직계 손들의 조상님 얼을 기리며
우리가 삶을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 하는데 있어서
진실하고
모두에게 공평하며
효도와 선의와 우정을 더하게 하여
모두에게 유익한 삶이 되소서
자손만대창대하리라
2020년 06월 08일 宗孫 炳昶(병창)[행]
나. 有聲咸豊李公載春 配孺人豊山洪今順之墓
공(公)의 휘는 재춘(載春)이고 자(字)는 재룡(재룡)이며 호(號)는 유성(有聲)이다.
본관은 함풍으로 함풍부원군 휘 광봉(光逢)은 시조이고 함성군 휘 극해(克諧)의 19세손이며 임란선무원종공신 이광선 장군의 12세손이고 휘 계연(啓連)은 조부이며 부(父) 휘 원범(元範)과 모(母) 곡부(曲阜) 공(孔)씨 사이에서 1940년 출생 외아들로 사랑받으며 12歲 유시부터 율산 문창규 선생 문하에서 갈고 닦은 학문과 뛰어난 행실로 곧고 바른 인품을 겸하여 사사로운 물욕에는 탐하지 않고 늘 정도를 가는 성품이며 슬하에는 4남 2녀를 생산하여 훌륭히 양육하였다.
지병으로 20여년 병마와 싸우는 동안 동반자 풍산 홍금순 여사는 천성이 온순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군을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여 백방으로 약을 쓰며 간호하였으나 따뜻한 애정과 보살핌도 마다하고 향년 71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
2020년 7월
방족제 재향(載香:함성군파) 약술하다.
• 1957. 10. 간행
• 2020. 5. 국역 편모
생졸: 1890.6.30~1957.8.16
松石 諱 啓明 影幀
8) 송석 휘 계명 유고집 (松石 諱 啓明 遺稿集)

• 본명 : 계명(啓明) / 자: 득성(得性) / 호 : 송석(松石) /나주생
• 본관 : 함풍(咸豐)·함평(咸平) / 시조 휘 광봉(光逢)祖의 23世 / 함성군 극해(克諧)祖 의 17世孫이며 이광선(李光先) 장군의 11世孫이다.
• 부(父) 학헌(鶴憲), 조(祖) 돈규(敦圭), 증조(曾祖) 봉서(鳳緖)
• 생몰년 : 1890년(高宗27) ~ 1957년(昭和32)
• 활동분야 : 문학, 시, 시조
◈. 상세설명
송석공(松石公)은 을사년(乙巳. 1905) 약관16세 유년시절부터 나주향교(羅州鄕校)에서 오랜 세월 갈고 닦은 높은 학문(學問)과 뛰어난 행실(行實)로 임오년(壬午. 1942)장의(掌議)역임, 성균관 유도회 지방위원, 67평생(平生)을 효우(孝友)와 덕행(德行) 애국(愛國)으로 세상에서 모범(模範)이 되셨다. 성품은 기본적으로 곧고 바른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러기에 세상을 대할 때 떳떳하고, 사물을 대할 때 사사로운 물욕에 사로잡히지 않으셨다. 그것은 곧 도문일치(道文一致)의 선비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려면 가슴 속에서 만권의 독서량이 쌓여서 피어나는 문자향(文字香)과 책에서 나오는 상스러운 기운인 서권기(書卷氣)가 흘러 넘쳐야 하기 때문이다.
사는 곳을 귀양(歸養)살이 하는 나주 땅이라 비유(比喩)하시며 조상이 잠든 산수가려(山水佳麗)한 향리(鄕里)에 소정(小亭)짓고 송석정(松石亭)이라 이름하고 강호(江湖)의 선비들과 교유(交遊)하며 망국(亡國)의 한(恨)을 달래며 민족의 얼을 대신한 소나무(松)를 사랑하셨다. 송석(松石)이라 자호(自號)한 뜻은 돌(石)같이 완고(頑固)하고, 꿋꿋한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 소나무(松)처럼 삶을 영위하겠다는 것이고, 시끄러운 세상의 명예(名譽)와 재물(財物)에는 관심 없고 술친구 글 선비와 송석정(松石亭)에 올라 벗들과 시(詩) 읊고 술(酒)과 풍류(風流)를 즐기시며 만년(晩年)을 지내셨다.
[참고문헌]
나주향교지 1947년 이민선 편저, 5卷1冊:圖;28.3×18.2㎝,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송석유고집 1957년 간행 / 석관정수리운 1937년 현판
귀후재기 1942년 현판 / 영사재상량문 1946년 현판
인수재중건기 1953년 현판 / 함성군파보서 1954년 보첩간행 외 다수

글/ 함성군파 재향(載香) 종친 협력으로 길현(吉鉉/行) 총무국장 기고
함성군 휘 극해(克諧)의 6세손 이광선(李光先)장군 일대기
1) 세계도
6세 玄雨/현우
7세 自寶/자보
8세 克諧/극해 (함성군)
함성군 이극해(李克諧)의 6세손 임란선무원종공신 이광선(李光先)장군 충의비
이광선(李光先)장군 충의비 전경
2) 문촌공(文村公) 이광선(李光先) 장군의 생애
가) 壬亂宣武原從功臣兵曹參判 咸豊李公光先將軍忠義碑
•소 재 지 :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 342
•주조(主祖) : 이광선(李光先) 자(字):여효(汝孝), 호(號):문촌(文村), 무과(武科) 절충장군 (折衝將軍) 임란공신(壬亂功臣), 병조참판(兵曹參判)
•생졸 : 1563(明宗癸亥) ~1616(光海丙辰) (54세)
•연혁(沿革) : 2001년 13세손 재향(載香)이 주간(主幹) 선조의 업적(業績)을 발굴정리(發 掘整理)하여 충의비(忠義碑) 건립추진위원회(建立推進委員會)에서 수립(竪立)
•약사(略史) :
① 1591년 무과급제 신묘별시문무과방목 등재(辛卯別試文武科旁目 登載)
② 1592년 4월 13일 경복궁(景福宮) 들어가 선조(宣祖)호위(護衛)부장(部將)
③ 1592년 6월 22일 선조(宣祖)를 호위하고 의주(義州)로 몽진(蒙塵) 호종(扈從)
④ 1592년 6월 22일 선조대왕(宣祖大王) 의주(義州)에 이르러 광선(光先)에게 선전관(宣 傳官) 제수(除授).
⓹ 1592년 7월 8일 권율장군 막하에 들어가 1,500명의 군사와 함께 이치(梨峙) 전투에 서 왜구(倭寇) 격퇴.
⓺ 1593년 2월 22일 권율장군 막하에서 정병(精兵) 2,300명이 행주전투(幸州戰鬪)에서 왜군(倭軍) 3만대군 격퇴(擊退).
⓻ 1599년 선략장군(宣略將軍), 소위장군(昭威將軍), 보공장군(保功將軍)
⓼ 1601년 건공장군(建功將軍), 소강진수군첨절제사(所江鎭水軍僉節制使)
⓽ 1602년 6월 戰功(전공)으로 행주대첩비에 기각(記刻).
⓾ 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책훈(策勳) 공신녹권(功臣錄券) 사급(賜給),
병조참판 贈.
⑪ 1609년 사직(辭職)후 나주고을 개선장군(凱旋將軍)하시다.
⑫ 1616년 8월 7일 향년 54세를 一期로 종고(終考)하시다.
⑬ 1902년 이치대첩비(梨峙大捷碑)에 기각(記刻).
⑭ 2001년 9월 7일 교지(敎旨)4점 및 공신녹권(功臣錄券)을 광주시 민속박물관(民俗博 物館)에 기탁보존(寄託保存)
⑮ 2001년 12월 13세손 載香 主幹(주간)하에 충의비(忠義碑) 건립추진위원회(建立推進 委員會)에서 비(碑)를 세우다.
⑯ 2002년 13세손 재향(載香) 主幹(주간) 문촌회관 건립
⑰ 2004년 13세손 재향(載香) 主幹(주간) 문촌회관 前 추모비(追慕碑) 수립
나) 임란공신(壬亂功臣) 이광선(李光先)장군 충의비(忠義碑) 개요(槪要)
㉠ 壬亂宣武原從功臣兵曹參判 咸豊李公光先將軍忠義碑
① 위치(位置) :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 342
② 수립(竪立) : 2001년 12월 2일
③ 찬자(撰者) : 함풍이씨 광주종친회장 계선
④ 규모(規模) : 비신높이 245㎝, 폭 85㎝ , 두께 55㎝ , 용갓 높이 107㎝ ,
거북좌대 높이 98㎝ , 총 높이 450㎝
㉡ 壬亂宣武原從功臣 李光先將軍忠義碑文
公의 諱는 光先(광선)이며 字(자)는 汝孝(여효)이고 號(호)는 文村(문촌)이며 本貫(본관)은 함풍(咸豐)이다. 始祖 咸豊府院君(함풍부원군) 光逢(광봉)의 11세손이며 咸城君(함성군) 諱 克諧(극해)의 6세손이다. 1563년 羅州 증문리에서 參奉(참봉) 夢楨(몽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幼年時節 莎村(사촌) 崔四勿(최사물)의 門下에서 經史(경사)를 통달하여 學問이 뛰어나셨으며 元來(원래) 性品(성품)은 忠直(충직)하고 義로우며 文武(문무)의 才能(재능)을 兼備(겸비)하여 勇力(용력)이 絶倫(절윤)하고 智略(지략)이 蓋世(개세)하여 세상 사람들이 公輔(공보)의 器局(기국)이 있음을 重(중)히 여겼다.
1591년 10월 武科(무과)及第(급제)하여 신묘별시무과방목에 오르시고 1592년 4월 13일 倭寇(왜구)의 侵犯(침범)으로 釜山(부산) 東萊(동래) 尙州(상주) 忠州(충주)가 연달아 陷落(함락)되고 전국 방방곡곡이 倭軍(왜군)에게 蹂躪(유린)되어 임금이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으니 참으로 痛歎(통탄)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將軍이 말씀하시기를 臣下는 마땅히 나라를 위해 忠誠(충성)을 다하여야 한다 하시고 즉시 景福宮(경복궁)에 들어가 宣祖(선조)의 特命(특명)을 받아 部將으로 1592년 4월 30일 임금을 호위하고 景福宮(경복궁)을 떠나 1592년 6월 22일 義州에 이르니 宣祖(선조)께서 嘉尙(가상)히 여기시고 특별히 宣傳官(선전관)을 除授(제수)하고 長劒(장검)과 수례를 下賜(하사)하셨다.
그 뒤 三南地方이 倭軍에 의해 不通되고 있다는 行朝(행조)의 命을 받고 왜군의 行惡(행악)에 悲憤慷慨(비분강개)하여 單騎(단기)로 東萊(동래)에 달려가 왜군의 包圍網(포위망)을 뚫고 적의 목 數十首(수십수)를 베고 곧바로 湖南倡義軍陣(호남창의군진)에 달려가 高因厚(고인후), 魯認(노인), 李忠立(이충립)과 적을 討伐(토벌)할 것을 謀議(모의)하고 즉시 權慄將軍(권율장군)과 協謀(협모)하여 1592년 7월 8일 1,500명의 군사로 梨峙(이치)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진산에 駐屯(주둔)한 왜군이 全州로 쳐들어옴에 梨峙에서 抗戰(항전)하여 왜군을 擊退(격퇴) 시키는데 큰 功(공)을 세웠다. 그리고 1593년 2월 12일 權慄將軍(권율장군)과 함께 精兵(정병) 2,300명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幸州山城(행주산성)을 들어와 토성을 쌓고 木柵(목책)을 치고 있을 때 평안도 황해도로부터 後退(후퇴)한 倭軍(왜군) 三萬大軍이 이날 새벽 총출동하여 幸州山城을 包圍(포위)하고 셋으로 나뉘어 교대하며 공격해 왔으나 워낙 山城이 높고 가파르며 我軍(아군)이 高地帶(고지대)에서 활과 총통을 쏘고 돌을 던졌기 때문에 쉽게 치고 올라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두울 무렵 일부 왜군이 방위가 若干(약간) 허술한 쪽으로 악착같이 달려들어 北쪽 낮은 성의 木柵(목책) 한 칸을 破壞(파괴)하고 쳐들어왔으며 그곳을 지키던 승려군이 동요되려하자 權慄將軍(권율장군)이 칼을 뽑아들고 여러 將軍을 호령하니 將兵들은 앞을 다투어 칼을 휘두르며 肉薄戰(육박전)을 敢行(감행)하였다. 이에 全軍이 죽음을 무릅쓰고 民官軍이 일치 團結(단결)하여 승병 婦女子(부녀자)까지 가담한 朝鮮軍(조선군)이 決死抗戰(결사항전) 함으로써 마침내 이를 물리치고 倭軍(왜군)은 크게 패하여 네 곳에 戰死者(전사자)의 시체를 모아서 태우고 달아났다.
朝鮮軍(조선군)이 그 나머지의 敵軍(적군)을 베인 것도 130首(수)에 달하였고 倭軍(왜군)이 버린 깃발, 투구, 갑옷, 무기 등을 얻은 것이 또한 많다하니 실로 큰 戰果(전과)라고 아니할 수 없으며 2,300명의 작은 軍隊(군대)로 三萬의 왜군을 擊退(격퇴)하여 왜군은 一萬여명의 死傷者(사상자)와 무기 727점을 버려둔 채 退却(퇴각) 하였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我軍(아군)과 明軍의 사기가 일어나 차차 왜군을 남으로 退却(퇴각) 시키고 다행히 政府(정부)가 還都(환도)하게 되었으니 그 意義는 실로 크다 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幸州大捷(행주대첩)에서 武功(무공)을 세운 事實(사실)을 宣祖(선조)께서 들으시고 매우 기뻐하시면서 나라가 어려울 때 공을 세운 士大夫(사대부)를 비롯하여 庶民(서민)이나 賤民(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團結(단결)하여 百尺竿頭(백척간두)에 선 祖國(조국)을 구한 것은 臣下(신하)의 뛰어난 功勳(공훈)이요 功이 있는 者에게는 상을 내리는 것이 나라의 떳떳한 道理이다 하시고 宣略將軍(선략장군), 昭威將軍(소위장군), 保功將軍(보공장군)으로 除授(제수)하여 1599년 敎旨(교지)를 내리시고 1601년 建功將軍(건공장군) 所江鎭水軍僉節制使(소강진수군첨절제사)로 除授하여 敎旨(교지)를 내리시니 나라를 위하여 忠誠(충성)을 다하였다.
壬亂勃發(임란발발)후 13년이 지난 1605년 다행히 朝廷(조정)이 평온을 찾자 그날의 武功(무공)을 가려 宣武原從功臣錄券(선무원종공신녹권)을 내리시고 宣祖께서는 將軍의 찬란한 業績(업적)에 感動(감동)하여 超拜兵曹參判(초배병조참판)을 증하셨으며 1609년 官職(관직)을 마치고 歸鄕(귀향)하셨으나 지난날 倭寇(왜구)의 侵略(침략)을 千秋(천추)의 恨(한)으로 여겨오던 중 1616년 8월 7일 54歲를 一期(일기)로 終命(종명)하셨다. 그러나 그 行績(행적)은 1602년 6월 일찍이 幸州大捷碑(행주대첩비)에 등재되었고 1964년 梨峙大捷碑(이치대첩비)에 등재되었으며 그 이름이 軍部에 記錄(기록)되고 壬亂忠義史錄 等(임란충의사록 등) 그 名聲(명성)과 德望(덕망)을 推仰(추앙)하여 보령호국사 금산 금곡사에 配享(배향)되었고 그 아름다운 敎旨(교지)와 錄券(녹권)은 400여 년 동안 대대로 이어 精誠(정성)을 다하여 保存하였으나 그동안 낡고 褪色(퇴색)되어 管理에 만전을 기하고자 2001년 9월 7일 光州市立民俗博物館(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寄託管理(기탁관리)하고 있다.
이제 將軍이 돌아가신지 385년이 지난 오늘 將軍의 13世孫 載香(재향)의 誠力(성력)으로 숨겨진 實記(실기)를 根據(근거)하여 그 거룩한 얼을 子孫萬代(자손만대)에 기리고자 鄕土民(향토민)들이 將軍의 救國哀情(구국애정)을 기리는 忠義碑建立推進委員會(충의비건립추진위원회)를 構成(구성)하여 後孫(후손)들의 뜻을 모아 救國決戰(구국결전)에 참여한 숭고한 愛國精神(애국정신)을 널리 선양하여 우리와 後孫에게 나라를 스스로 지키는 自主精神(자주정신)을 길이 繼承(계승)하고자 한다.
西紀 2001年 12月 日
傍孫 咸豊李氏光州宗親會長 啓善 謹撰 晉州人 姜炯埰 謹書
㉢ 忠義碑竪立推進委員(충의비수립추진위원)
委員長 : 崔炳喆 (나주시 제2 건국위원장)
委 員 : 崔仁基(전행자부장관), 金大棟(나주시장), 丁埰玉(나주경찰서장), 裵根鎬(나주시교육장), 崔甲柱(나주시의정동우회장), 崔玟奎(전대성여고교장), 丁潤國(향토사학자), 鄭濟甲(나주향교유도회장), 梁海燮(대한시우회지회장), 林東烈(전다시면 노인회장), 李民寬(향토문화연구원장), 韓斗鉉(나주시노인회장), 盧涏(동산공장사장), 安鍾鉉(다시면노인회장), 林元澤(나주향교전교), 崔榮五(전다시중학교장학회이사), 柳基相(고흥유씨나주종중대표), 鄭判會(전다시면장), 朱東植(나주시지편찬위원), 朴祥雨(행정동우회회장), 李連洙(광주시립민속박물관장), 文章浩(의재문화재단연진회회장), 李明憲(서울종친회장), 李啓春(대종회부회장), 李載鶴(대한노인회전납협의회장), 李載根(전대종회장,전국회의원), 李敏燮(여주종친회장), 李敦禹(고창군의회의장), 李啓勉(여주종친회장), 李栽賢(무안군수), 李啓長(김포부시장), 李光男 (추진위원간사)
㉣ 忠義碑竪立記 (충의비수립기)
宣祖(선조) 25년(1592) 壬辰年 倭寇(왜구)의 侵略(침략)으로 百尺竿頭(백척간두)에 선 민족의 運命(운명)을 구하고자 先民(선민)들이 大同團結(대동단결)하여 祖國(조국)을 지킨 참뜻을 기리고 잊혀지는 壬亂勝戰(임란승전)의 영광을 재현하고 조상의 찬란한 業績(업적)을 대대로 이어 傳(전)하고자 壬亂功臣(임란공신) 李光先將軍(이광선장군)의 功勳(공훈)을 기리고 빛내기 위하여 지역 유지들이 忠義碑竪立推進委員會(충의비수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記刻(기각)된 후손들의 誠金(성금)과 文村公門中(문촌공문중)의 財源(재원)으로 여기에 祖上(조상)의 거룩한 얼이 담긴 史蹟碑(사적비)를 세워 文化遺蹟(문화유적)으로 유지 保存하여 역사의 산 敎育場(교육장)으로 子孫萬代(자손만대)에 길이 전할 것이며 올바른 歷史觀(역사관)을 정립하고 民族正氣(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데 있어서도 중대한 敎訓(교훈)이 될 것이다. 또한 이 史蹟(사적)은 지역에 국한된 遺跡(유적)이 아니라 壬亂功臣(임란공신) 李光先 將軍(이광선 장군)에 대한 올바른 歷史(역사)적 認識(인식)으로 이를 길이 전하여 잊혀 지지 않는 史蹟(사적)으로 역할을 다할 것이다.
西紀 2001年 12月 日
忠義碑竪立推進執行委員會(충의비수립추진집행위원회)
文村公門會長 載厚(문촌공문회장 재후)
總務 載香, 財務 春載, 監事 載熙
※ 參考文獻(참고문헌)
·宣武原從功臣錄券(선무원종공신녹권), 敎旨(교지), 宣祖實錄(선조실록), 幸州大捷碑(행주대첩비), 梨峙大捷碑(이치대첩비), 湖南節義錄(호남절의록), 錦城三綱錄(금성삼강록), 晩翠堂實紀壬亂參佐諸公錄(만취당실기임란참좌제공록), 忠壯公權慄將軍實記(충장공권율장군실기), 金谷祠誌(금곡사지), 壬亂功臣遺史誌(임란공신유사지), 壬亂史料集(임란사료집), 壬亂忠義史錄(임란충의사록), 羅州郡人物誌(나주군인물지), 全南道誌(전남도지), 외 多數
3) 무과 급제 /신묘별시문무과방목/선조24년(1591) 10월
(출처/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 소장)
2쪽 4쪽 李光先(이광선)
武科(무과)乙科(을과)15위(16/300)
4) 李光先 將軍 敎旨(이광선 장군 교지)
이광선
선략장군훈련원첨정
사령일 : 선조32년(1599) 7. 7.
이광선 소위장군훈련원첨정무신겸선전관
사령일 : 선조32년(1599) 8. 21.
이광선 보공장군훈련원첨정무신겸선전관
사령일 : 선조32년(1599)9. 28.
이광선
건공장군소강진수군첨절제사
사령일 : 선조34년(1601) 7. 5.
5) 선무원종공신녹권 부장 이광선(李光先)
·宣武原從功臣錄券
部將 李光先
(원문)
宣武原從功臣錄券
部將李光先
萬曆三十三年四月十六日 行都承旨臣申欽 敬奉
傳旨 國多難而靡定爾既宣力於 中興功無微而不酬
予乃推恩於 原從誕擧新典式遵舊 章言念南寇之
陸梁致有西土之播越縱橫豺虎慘見
宗社之蒙塵跋涉山川忍說君臣 之中露天 欲興唐而
父母拯己人猶戴晋而大小忘勞身幸戡亂而回鑾遂策
勳 而銘鼎 惟爾卿士大夫曁士庶人或揚我武烈或
助我軍需 執殳驅馳 或有捐軀之士提兵戰伐或有
獻馘之徒 悉錄於兹未傳於後 惟輕惟重分一時之
功勞 爾子爾孫享萬世之安樂 故玆敎示想宜知悉
선무원종공신녹권 [국역] 부장 이광선
1605년(선조 38) 4월 16일 행도승지 신흠은 경건히 왕명을 받들다.
나라가 매우 어지럽고 쓰러지려 할 때에 모두들 힘을 합쳐 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니 돌이켜 보건대 옛 어진 제도와 문물을 본받아 새 법을 만들어 이들을 원종공신으로 녹훈토록 한다. 남쪽에 있는 왜구의 도둑떼들이(남침) 분탕질을 하여 임금은 도성을 버리고 떠나갔으며 미친 호랑이와 늑대들이 전국을 누비며 약탈을 진행하니 이는 참혹한 광경이었다.
종묘사직과 임금은 피난길(蒙塵)에 올라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군신(君臣)들은 야외에서 밤을 새웠으며 부모님을 받들 듯 죽음을 가리지 아니하고 앞을 헤쳐 나아갔다.
다행이 왜란이 평정되어 어가가 환궁하게 되었으니 이에 공을 세운 사대부를 비롯하여 서인이나 천민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공적을 들추어 새기(정명:鼎銘) 도록 하라. 무공을 세웠거나 군수품(軍需品)을 지키고 옮기는데 도움을 주었거나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적을 무찔러 도둑의 목을 베워왔거나 그밖에 많은 공을 세운 사람들을 가려내어 책훈토록 하라. 그리고 그 공을 후세에 이어받아 영원히 전하며 그들의 아들들과 손자들이 오래도록 행복과 영광을 누려야 하겠기에 이를 교시(敎示)하여 널리 알리도록 하여라.
·宣武原從功臣錄券 賜給
部將 李光先
(원문)
萬曆三十三年四月十六日 行都承旨 臣申欽 敬奉
傳旨 宣武原從功臣一等乙良 各加一資 子孫承蔭宥
及後世父母封爵 二等乙良 各加一資 子孫承蔭宥
及後世子孫中 從自願加散官一資 其中 無子孫者
兄弟壻姪中 從自願加散官一資 三等乙良 各加一
資 子孫承蔭宥及 後世爲乎矣 各等通訓以上乙良
子孫 兄弟甥姪女婿中一人 從自願加散官一資 物
故人乙良 各依本等施行爲旀 各追贈一資爲齊 犯
罪作散人乙良 並於本品叙用 爲齊 永不叙用人乙
良 許通仕路爲齊 職牒收取人乙良 幷只還給爲齊
妾子乙良 限品安徐爲齊 公私賤口乙良 並只免賤
爲齊 係干逆黨及因逆賊公事間事被罪者乙良 官
爵一款 擧行安徐爲只爲下 吏曺爲良如敎
선무원종공신녹권 사급 부장 이광선 [국역]
1605년(선조 38) 4월 16일 행도승지 신흠 삼가 받들다.
상벌에 관한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전한다.(傳旨)
선무원종공신 1등은 각자 품계를 한 등급씩 높여주고 그의 자손들은 조상의 음덕을 이어받게 하고 부모에게는 봉작을 주라. 2등은 각자 품계를 한 등급씩 높여주며 음덕으로 후손에게는 직무가 없는 벼슬(散官)을 주어 후손들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며 만약 자손이 없는 자에게는 형제나 조카 생질 중에서 직책 없는 벼슬자리를 주라. 3등은 각자 품계를 한 등급씩 높여주며 자손들에게는 훌륭한 선조의 공적을 후세에 잇게 하라. 그리고 각 등급의 통정대부(정3품) 이상의 자손, 형제, 생질, 사위 중 한 사람을 골라 한직을 주어 공을 잇게 하며 고인(故人)은 본 법에 의하여 시행토록 하며(위작) 품계를 한 등급 높여 추증토록 하라.
죄를 짓고 면제되어서도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散人)은 다시 임용(敍用)토록 하며 영원히 재 등용할 수 없는 사람은 벼슬길(仕路)에 나아가도록 허락해 주라. 직첩(벼슬 임명장)을 회수당한 사람은 다시 반환해 줄 것이며, 첩의 자식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구제해 주고,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종(賤口)으로 부리고 있는 사람은 다만 종의 신분을 면제해주게 하라. 역당과 역적으로 인하여 죄를 저지른 사람은 벼슬자리를 마련하여 서서히 쓰도록 하게하고 이조로 하여금 시행토록 하라.
6) 石串亭 榮山江第一景 羅州 第一亭(석관정 영산강 제1경 나주제1정)
咸城君 諱 克諧 曾孫 諱 盡忠(진충)이 1530년 창건.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844번지
영산강과 고막원천이 합류되는 경관이 화려한 절승지에 위치하고 있다.
2001.10.21.촬영 재향
石串亭(석관정)
석관정 연혁비
⋅석관정 연혁비(石串亭 沿革碑)
咸豊李氏 縣監公 石串 盡忠이 武科及第하여 新寧縣監을 歷任한후 歸鄕하여 榮山江과 古幕江이 合流되는 석관정 나루터 江上에 솟은 絶壁 위 景觀이 秀麗한 絶勝地에 1530年 中宗25年 亭子를 創建하여 石串이라 亭題하고 後孫의 講學과 逍遙自適 하시며 晩年의 休養地로 지낸 곳이다.
曾孫 壬亂宣武原從功臣 李光先將軍이 少時에 經史를 通達하고 浩然之氣를 鍊磨하며 亭記와 題詠詩를 남겼는데 丁酉再亂의 倭侵으로 廢墟가 되자 後孫들이 두 차례 손질을 하였고 1755年 英祖31年 7世孫 揚武原從功臣 參判 時昌이 草家 두어 간을 세웠으나 風雨로 老朽되어 1906年 13世孫 春憲이 財産을 出捐하여 12世孫 敦鶴 13世孫 穆憲 壽憲 時憲 帝憲이 協力하여 重建하였고 1937年 돌을 깎아 기둥을 세우고 시멘트를 발라 마루를 만들 때 처음부터 끝까지 勞力한분은 13世孫 黙憲 14世孫 啓林 啓鴻 啓明이며 기와를 덮을 때 食糧全部를 啓萬이 自擔하여 栢文諸宗의 協力으로 完工하니 이 事實을 13世孫 光憲이 重修記에 敍述하여 現存하였고 1990年 12世孫 敦明이 後孫들의 뜻을 모아 重修 推進중 作故하자 15世孫 英範과 16世孫 光男이 推進委員會를 構成하여 諸宗의 追慕하는 精誠과 誠金으로 1998年 前과 같이 正面二間 側面二間 石造 八作골기와 지붕으로 重建하여 代代로 이어온 祖上의 거룩한 얼이 담긴 이 遺蹟을 永久保存하여 子孫萬代 傳授할 것이다.
西紀 2002年 9月 日 / 16世孫 載香 考證 記錄하다.
중건추진위원회
위 원 장 : 영범 위 원 : 길범 /재후 /승범
부위원장 : 문석 재량 /재신 /계옥
총 무 : 광남 병재 /재규 /창범
재송 /재덕
2020. 6 /종손 載春 子 炳昶(行) 수립
7) 문촌공(文村公) 이광선(李光先)將軍의 後孫 根憲, 載春 之墓 전경
(표지석 문장 내용)
가. 동백 함풍 이공 근헌 자는 춘
직계 손들의 조상님 얼을 기리며
우리가 삶을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 하는데 있어서
진실하고
모두에게 공평하며
효도와 선의와 우정을 더하게 하여
모두에게 유익한 삶이 되소서
자손만대창대하리라
2020년 06월 08일 宗孫 炳昶(병창)[행]
나. 有聲咸豊李公載春 配孺人豊山洪今順之墓
공(公)의 휘는 재춘(載春)이고 자(字)는 재룡(재룡)이며 호(號)는 유성(有聲)이다.
본관은 함풍으로 함풍부원군 휘 광봉(光逢)은 시조이고 함성군 휘 극해(克諧)의 19세손이며 임란선무원종공신 이광선 장군의 12세손이고 휘 계연(啓連)은 조부이며 부(父) 휘 원범(元範)과 모(母) 곡부(曲阜) 공(孔)씨 사이에서 1940년 출생 외아들로 사랑받으며 12歲 유시부터 율산 문창규 선생 문하에서 갈고 닦은 학문과 뛰어난 행실로 곧고 바른 인품을 겸하여 사사로운 물욕에는 탐하지 않고 늘 정도를 가는 성품이며 슬하에는 4남 2녀를 생산하여 훌륭히 양육하였다.
지병으로 20여년 병마와 싸우는 동안 동반자 풍산 홍금순 여사는 천성이 온순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군을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여 백방으로 약을 쓰며 간호하였으나 따뜻한 애정과 보살핌도 마다하고 향년 71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
2020년 7월
방족제 재향(載香:함성군파) 약술하다.
• 1957. 10. 간행
• 2020. 5. 국역 편모
생졸: 1890.6.30~1957.8.16
松石 諱 啓明 影幀
8) 송석 휘 계명 유고집 (松石 諱 啓明 遺稿集)
• 본명 : 계명(啓明) / 자: 득성(得性) / 호 : 송석(松石) /나주생
• 본관 : 함풍(咸豐)·함평(咸平) / 시조 휘 광봉(光逢)祖의 23世 / 함성군 극해(克諧)祖 의 17世孫이며 이광선(李光先) 장군의 11世孫이다.
• 부(父) 학헌(鶴憲), 조(祖) 돈규(敦圭), 증조(曾祖) 봉서(鳳緖)
• 생몰년 : 1890년(高宗27) ~ 1957년(昭和32)
• 활동분야 : 문학, 시, 시조
◈. 상세설명
송석공(松石公)은 을사년(乙巳. 1905) 약관16세 유년시절부터 나주향교(羅州鄕校)에서 오랜 세월 갈고 닦은 높은 학문(學問)과 뛰어난 행실(行實)로 임오년(壬午. 1942)장의(掌議)역임, 성균관 유도회 지방위원, 67평생(平生)을 효우(孝友)와 덕행(德行) 애국(愛國)으로 세상에서 모범(模範)이 되셨다. 성품은 기본적으로 곧고 바른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러기에 세상을 대할 때 떳떳하고, 사물을 대할 때 사사로운 물욕에 사로잡히지 않으셨다. 그것은 곧 도문일치(道文一致)의 선비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려면 가슴 속에서 만권의 독서량이 쌓여서 피어나는 문자향(文字香)과 책에서 나오는 상스러운 기운인 서권기(書卷氣)가 흘러 넘쳐야 하기 때문이다.
사는 곳을 귀양(歸養)살이 하는 나주 땅이라 비유(比喩)하시며 조상이 잠든 산수가려(山水佳麗)한 향리(鄕里)에 소정(小亭)짓고 송석정(松石亭)이라 이름하고 강호(江湖)의 선비들과 교유(交遊)하며 망국(亡國)의 한(恨)을 달래며 민족의 얼을 대신한 소나무(松)를 사랑하셨다. 송석(松石)이라 자호(自號)한 뜻은 돌(石)같이 완고(頑固)하고, 꿋꿋한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 소나무(松)처럼 삶을 영위하겠다는 것이고, 시끄러운 세상의 명예(名譽)와 재물(財物)에는 관심 없고 술친구 글 선비와 송석정(松石亭)에 올라 벗들과 시(詩) 읊고 술(酒)과 풍류(風流)를 즐기시며 만년(晩年)을 지내셨다.
[참고문헌]
나주향교지 1947년 이민선 편저, 5卷1冊:圖;28.3×18.2㎝,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송석유고집 1957년 간행 / 석관정수리운 1937년 현판
귀후재기 1942년 현판 / 영사재상량문 1946년 현판
인수재중건기 1953년 현판 / 함성군파보서 1954년 보첩간행 외 다수
글/ 함성군파 재향(載香) 종친 협력으로 길현(吉鉉/行) 총무국장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