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풍(함평)의 인물 기성군(箕城君) 이긍(李兢)祖 조명
1) 기성군(箕城君) 이긍(李兢)
호(號)는 오당(梧堂)이며 기성군 이긍(李兢)(1389~1433)은 1405년 문과에 급제한 후 1427년(세종 9)중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승정원 교리, 승정원 제조, 판사재감사, 예조참의, 승정원 우부대언, 이조 좌·우참의, 공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사후(死後) 이조판서(吏曹判書)와 기성군(箕城君)에 봉해지는 영예를 누렸다.
이긍(李兢)은 세종(世宗)의 신임을 받아 1425년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가서 탁영시(擢英詩)에 당당히 합격함으로써 명(明)나라 선종(宣宗)의 상찬을 받았고, 또한 전서(篆書)를 잘 써서 명필(名筆)이라는 칭찬을 받은 일은 유명하며, 계축1433)년 5월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사명을 띠고 다시 명나라에 갔다가 외교실패로 돌아오는 도중에 첨수참(甛水站)에서 분사(憤死:분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 하면서 절명시(絶命詩:목숨을 끊기 전에 지은 시)를 남기고 44세를 일기로 순직(殉職)함에 세종대왕(世宗大王)은 나라의 인재를 잃었다하여 애도하시고 관곽(棺槨)과 미두(米豆) 70석을 하사 하시면서 승지(承旨) 임은(林垠)에게 명하여 제사를 베풀고 광주 두방향(斗坊鄕) 현 북구 각화동 갑좌(甲坐)벌에 예장토록 하였다.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란 중국 명(明)나라 서적(書籍)에 조선(朝鮮)왕조(王祖)의 조상이 잘못 기록되어(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되어 있는 것을 고치도록 주청(奏請)한 일로 중국 명(明)나라에 이긍(李兢)이 세 번이나 갔으나 조선왕조의 선계(先系)을 바로잡지 못함을 죽음으로 충정(忠情)을 보였다. 그러나 정작 본인의 선조(先祖)와 후손(後孫)이 잘못 기록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시조(始祖)를 가상(假想)의 인물로 바꾸는 것도 모자라 조선실록의 국조방목(國朝榜目)에 선계(先系)가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기성군(箕城君) 이긍(李兢)祖의 선계(先系)를 족보(族譜)에 방목(榜目)과 다르게 기록한 것 하며, 세종실록에 이긍(李兢)의 자녀가 3男 2女라고 뚜렷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 또한 족보에 4男 1女로 다르게 기록한 것은 치욕의 족보사(族譜史)이다.
2) 기성군(箕城君) 이긍(李兢)의 신도비명(神道碑銘)

기성군(箕城君) 이긍(李兢)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송규헌(宋奎憲)선생이 비문(碑文)을 쓰고 본인(本人)의 사위유고집(史謂遺稿集)에“기성군이공신도비명(箕城君李公神道碑銘)”을 쓰면서“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이 공(公:이긍)의 시조(비조)다.”라고 수록되어있다.
≪序曰李氏咸平人高麗咸豊府院君於公爲鼻祖≫= 번역하면≪비문 서두에 새기기를 이긍(李兢)은 함평인이며 고려함풍부원군은 공의 비조(시조)가 되고...≫라고 했다. 이는 함풍부원군은 휘 광봉(光逢)祖라는 것이다.
위의 비문(碑文) 어디에도 시조가 언(彦)이라고 기록된 게 없다. 이긍(李兢)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 시조는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이라고 했다. 즉, 시조는 휘 광봉(光逢)祖라는 것이다.
송규헌(宋奎憲;1870~1938)은 자(字)가 사위(史謂)이고 호(號)는 노탄(老灘)이며, 본관(本貫)은 은진(恩津)이다. 1892년(壬辰) 고종(高宗) 29년에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한 분으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선생의 6대손(六代孫)이다.
3) 변이중(邊以中)은 누구인가? (李兢의 高孫女의 둘째아들 이다.)
본관(本貫)은 황주(黃州)이며, 자(字)는 언시(彦時), 호(號)는 망암(望庵)이다. 1546년 전라도 장성현 읍서면(현재의 장성읍) 장안리 장안(長安)부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참봉 변택(邊澤)이며, 어머니는 함풍이씨(咸豊李氏)로 기성군(箕城君) 이긍(李兢)의 막내아들 계강(季江)의 증손녀이다. 일찍이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글과 학문을 수학하였고, 또한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1568년(선조1)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7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에는 전라도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군비(軍備) 수습에 힘썼다. 그 뒤 조도어사(調度御使)가 되어 누차 전공을 세우는 한편, 화차(火車) 300량을 제조하여 순찰사(巡察使) 권율(權慄)에게 주어, 행주대첩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 그는 조도어사가 되어 양천산에 주둔해 있을때 묘책을 써서 왜적을 물리치는 등 누차 전공을 세웠으며, 1600년(선조 33) 사옹원정, 1603년 함안군수를 지내다가 1605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장성에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이이와 성혼의 학통을 이어받아 성리학과 경학에 밝았으며, 군사전략에도 밝아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변이중(邊以中)이 쓴「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화차도설(火車圖說)」에 의거하여 화차를 제조한 공로는 우리나라 과학사에 있어서 커다란 업적이었다. 강항(姜沆)이 지은 묘지명과 이정구(李庭龜)가 지은 묘갈명 등에서 변이중의 학문과 인품, 뛰어난 전략과 창의성에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뒤에 이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장성 봉암서원(鳳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망암집(望庵集)』이 있다.
글/ 建煥(인호) 기성군파
함풍(함평)의 인물 기성군(箕城君) 이긍(李兢)祖 조명
1) 기성군(箕城君) 이긍(李兢)
호(號)는 오당(梧堂)이며 기성군 이긍(李兢)(1389~1433)은 1405년 문과에 급제한 후 1427년(세종 9)중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승정원 교리, 승정원 제조, 판사재감사, 예조참의, 승정원 우부대언, 이조 좌·우참의, 공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사후(死後) 이조판서(吏曹判書)와 기성군(箕城君)에 봉해지는 영예를 누렸다.
이긍(李兢)은 세종(世宗)의 신임을 받아 1425년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가서 탁영시(擢英詩)에 당당히 합격함으로써 명(明)나라 선종(宣宗)의 상찬을 받았고, 또한 전서(篆書)를 잘 써서 명필(名筆)이라는 칭찬을 받은 일은 유명하며, 계축1433)년 5월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사명을 띠고 다시 명나라에 갔다가 외교실패로 돌아오는 도중에 첨수참(甛水站)에서 분사(憤死:분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 하면서 절명시(絶命詩:목숨을 끊기 전에 지은 시)를 남기고 44세를 일기로 순직(殉職)함에 세종대왕(世宗大王)은 나라의 인재를 잃었다하여 애도하시고 관곽(棺槨)과 미두(米豆) 70석을 하사 하시면서 승지(承旨) 임은(林垠)에게 명하여 제사를 베풀고 광주 두방향(斗坊鄕) 현 북구 각화동 갑좌(甲坐)벌에 예장토록 하였다.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란 중국 명(明)나라 서적(書籍)에 조선(朝鮮)왕조(王祖)의 조상이 잘못 기록되어(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되어 있는 것을 고치도록 주청(奏請)한 일로 중국 명(明)나라에 이긍(李兢)이 세 번이나 갔으나 조선왕조의 선계(先系)을 바로잡지 못함을 죽음으로 충정(忠情)을 보였다. 그러나 정작 본인의 선조(先祖)와 후손(後孫)이 잘못 기록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시조(始祖)를 가상(假想)의 인물로 바꾸는 것도 모자라 조선실록의 국조방목(國朝榜目)에 선계(先系)가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기성군(箕城君) 이긍(李兢)祖의 선계(先系)를 족보(族譜)에 방목(榜目)과 다르게 기록한 것 하며, 세종실록에 이긍(李兢)의 자녀가 3男 2女라고 뚜렷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 또한 족보에 4男 1女로 다르게 기록한 것은 치욕의 족보사(族譜史)이다.
2) 기성군(箕城君) 이긍(李兢)의 신도비명(神道碑銘)
기성군(箕城君) 이긍(李兢)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송규헌(宋奎憲)선생이 비문(碑文)을 쓰고 본인(本人)의 사위유고집(史謂遺稿集)에“기성군이공신도비명(箕城君李公神道碑銘)”을 쓰면서“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이 공(公:이긍)의 시조(비조)다.”라고 수록되어있다.
≪序曰李氏咸平人高麗咸豊府院君於公爲鼻祖≫= 번역하면≪비문 서두에 새기기를 이긍(李兢)은 함평인이며 고려함풍부원군은 공의 비조(시조)가 되고...≫라고 했다. 이는 함풍부원군은 휘 광봉(光逢)祖라는 것이다.
위의 비문(碑文) 어디에도 시조가 언(彦)이라고 기록된 게 없다. 이긍(李兢)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 시조는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이라고 했다. 즉, 시조는 휘 광봉(光逢)祖라는 것이다.
송규헌(宋奎憲;1870~1938)은 자(字)가 사위(史謂)이고 호(號)는 노탄(老灘)이며, 본관(本貫)은 은진(恩津)이다. 1892년(壬辰) 고종(高宗) 29년에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한 분으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선생의 6대손(六代孫)이다.
3) 변이중(邊以中)은 누구인가? (李兢의 高孫女의 둘째아들 이다.)
본관(本貫)은 황주(黃州)이며, 자(字)는 언시(彦時), 호(號)는 망암(望庵)이다. 1546년 전라도 장성현 읍서면(현재의 장성읍) 장안리 장안(長安)부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참봉 변택(邊澤)이며, 어머니는 함풍이씨(咸豊李氏)로 기성군(箕城君) 이긍(李兢)의 막내아들 계강(季江)의 증손녀이다. 일찍이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글과 학문을 수학하였고, 또한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1568년(선조1)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7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에는 전라도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군비(軍備) 수습에 힘썼다. 그 뒤 조도어사(調度御使)가 되어 누차 전공을 세우는 한편, 화차(火車) 300량을 제조하여 순찰사(巡察使) 권율(權慄)에게 주어, 행주대첩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 그는 조도어사가 되어 양천산에 주둔해 있을때 묘책을 써서 왜적을 물리치는 등 누차 전공을 세웠으며, 1600년(선조 33) 사옹원정, 1603년 함안군수를 지내다가 1605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장성에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이이와 성혼의 학통을 이어받아 성리학과 경학에 밝았으며, 군사전략에도 밝아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변이중(邊以中)이 쓴「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화차도설(火車圖說)」에 의거하여 화차를 제조한 공로는 우리나라 과학사에 있어서 커다란 업적이었다. 강항(姜沆)이 지은 묘지명과 이정구(李庭龜)가 지은 묘갈명 등에서 변이중의 학문과 인품, 뛰어난 전략과 창의성에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뒤에 이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장성 봉암서원(鳳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망암집(望庵集)』이 있다.
글/ 建煥(인호) 기성군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