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손가 필선공파 이석범(李錫範) 독립운동가 조명
1) 함풍(함평)이씨 필선공파 독립운동가 이석범
. 이석범(李錫範), 양양 만세운동의 지도자
. 이석범(李錫範)第 이국범(李國範) 2005년 독립유공자 애국장
. 이석범(李錫範)長子 이재훈(李載薰) 1990년 독립유공자 애국장
. 이석범(李錫範)次子 이재형(李載炯) 2005년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창장
2) 이석범 독립운동 약사
가. 이석범(李錫範), 양양 만세운동의 지도자
이석범(李錫範)1859(철종 10)∼1932, 독립운동가, 양양 출신, 자(字) 사일(士一), 호(號) 설초(雪樵), 1919. 3.1 운동시 독립운동 본부를 양양 임천리에 설치 조직하였고 양양지역에서 3·1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왜경에 체포되었다. 양양유림 대표로서 현산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쌍천서숙을 설립하여 후학 양성에도 기여하였다.
이석범(李錫範)은 1919년 3월 1일 고종황제의 인산(因山)에 참례키 위해 양양지역 대표로 일행 10여 명들과 함께 참례하고, 서울 탑골공원의 독립만세시위 현장을 직접 목격한 후 배일사상(排日思想)을 가슴에 품고 독립선언서 등의 문헌을 버선 속에 숨겨 가지고 양양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이석범은 양양지역 총주동자로서 동생 이국범(李國範)과 자기의 두 아들 장남 능열[能烈, 載勳]과 차남 동열[東烈, 載炯]을 표면에 내 세우고 선봉장으로 활동하도록 지시함과 동시에, 젊은 청년들이 배워야 나라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1913년 도천에 설립한 쌍천서숙의 제자들인 졸업생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할 조직을 세웠다. 중도문리는 김영경(金英經)을, 강현면 적은리(積銀里)의 장세환(張世煥)등을 시켜서 물치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토록 지시하고 이석범은 양양지역의 만세운동을 논의하기로 정한 함풍이씨 문중인 이교완 집이 있는 임천리로 왔다.
양양면 임천리로 이동한 총주동자(總主動者) 이석범(李錫範)은 儒林(유림)계의 임천리 계획과 基督敎(기독교) 감리교 계획인 양양면 계획 등 郡(군) 전체계획을 수립 한 후, 김명기(金明基)와 함께 1919년 4월 2일 강원도 양양군 양양면 임천리 이교완(李敎完) 집에서 최인식(崔寅植)을 만나 양양면 읍내 등지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협의하고 최인식은 양양읍의 남부(양양면 거마리등), 김명기(金明基)는 양양읍의 북부(도천면 논산리등)을 담당토록 하고 4월 3일에는 장인원(張仁源)에게 양양군 강현면 적은리 등지의 주민들을 선동하도록 계획을 수립하였다.
1919년 4월 1일부터 임천리 이교정, 이건충의 집에서 옥양목과 백지로 태극기 1,100여개를 만들던 중 동년 4월3일 이교정의 집에서 만들고 있는 사실이 군수 이동혁에게 발각되어 태극기 374매 및 제작도구인 등사기 등을 압수 당하고, 주모급 이석범을 비롯한 22명이 붙잡혀 갔다.
일본관헌에 체포된 이석범(李錫範)은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으로 압송된 후 보안법위반(保安法違反)혐의로 동년 10월 8일 언도한 징역 8월의 유죄판결에 불복하여 공소(控訴)신청 동년 11월 26일 경성복심법원으로부터 원심취소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미결구금(未決拘禁)상태에서 233일(7개월 23일)간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 형무소에서 옥고(獄苦)를 치렀다. 1927년 이석범의 주도 하에 신간회를 창립하여 반일 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선전조직에 활약 하였다. 동생 이국범(李國範)과 아들 이재훈 역시 도천면 중도문리 일대에서 양양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참고문헌】「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 11.26),
강원도사 10권 인물 394쪽. 항일독립운동사(Ⅰ)
독립기념관 자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9권 국내3.1운동 (중부.북부) ->
제3장 강원지역 12. 양양 137쪽,138쪽에 이석범의 활동 기록.
강원도사 10권 인물 394쪽 이석범의 기록은 이석범의 실제 기록과 다르다. 양양의 다른 독립운동가의 활약이 오기 됐다.
나. 이국범(李國範) 2005년 독립유공자 애국장 (이석범(李錫範)의 동생)
이국범(李國範) 1869(고종 6)∼1931, 독립유공자, 속초 출신. 1919년 4월 4일부터 9일까지 양양군 도천면(道川面)과 강현면(降峴面)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지역의 만세운동은 고종황제 인산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지니고 귀향한 이석범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석범(李錫範)은 그의 아우인 이국범(李國範)과 아들인 이능렬(李能烈)을 앞세우고 쌍천학교(雙川學校) 졸업생을 동원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는 유학자로서 평소 일제의 강제병합에 분개하고 있던 중, 고종황제의 서거 소식을 듣고 군내 양반 유생들에게 양양읍 밖에서 요배식(遙拜式)을 거행하도록 하는 등 항일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형으로부터 만세운동 계획을 들은 이국범(李國範)은 이에 적극 참여하여 김영경(金英經)·장세환(張世煥) 등과 도천면과 강현면 주민들을 동원하여 4월 4일부터 9일까지 연 6일 동안 읍내 대포(大浦)·물치(沕淄)·왕도(旺道)·기사문(基士門) 등지에서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7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판결문」(고등법원, 1919.10.11), 「속초시지」(1991),
강원도사 10권 인물 365쪽. 항일독립운동사(Ⅳ),
독립기념관 자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9권 국내 3.1운동 (중부·북부)…
제3장 강원지역 12. 양양 137쪽, 142145쪽에 이국범의 활동 기록.
다. 이재훈(李載薰) 1990년 독립유공자 애국장 (이석범(李錫範)의 장남)
이재훈(李載勳, 能烈) 1888(고종 25)∼1951, 독립유공자, 양양 출신(도천면 중도문리), 이명 능렬(能烈). 1919년 4월 4일 이종국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고 물치장날 독립만세운동을 계획, 5일 물치장터에서 5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도천면 군중과 합세,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재훈은 양양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이석범의 아들로 도천면 중도문리(中道門里)에서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도천면 중도문리 만세운동은 이석범의 동생 이국범(李國範)과 아들 이재훈을 내세워 추진했는데, 재판 판결문에 따르면 이재훈은 정치의 변혁을 목적할 의사가 있어 1919년 4월 4일 밤 양양군 도천면 중도문리 이종국(李鍾國) 방에서 차압된 태극기 2폭을 작성하고 동 이민 수명에 대하여 명 5일 강현면 물치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겠음에 대해서 여기 참가하라고 선동하고, 다음 5일 정오 경 물치시장에서 선동에 응해서 모여드는 군중 수백 명을 지휘하여, 전시 태극기를 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다시 위 군 중을 거느리고 약 20정 거리인 도천면 대포(大浦)경찰관주재소 부근에 이르러 다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또 군중에 대하여‘양양경찰서에서 독립만세를 부를 것이며, 동월 6일은 양양읍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또 구속된 사람을 석방하도록 요구할 터인데 일동도 와서 참가하라’는 취지를 말하고 선동하여 동월 6일 오후 1시 경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양양읍 시장에서 전시 태극기를 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로 인해 징역 1년 8월을 언도받았다.
1982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6.14),
강원도사 10권 인물 424쪽 항일독립운동사(Ⅰ)
독립기념관 자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9권 국내 3.1운동 (중부·북부)…->,
제3장 강원지역 12. 양양 137쪽, 141쪽에 이재훈의 활동 기록.
라. 이재형(李載炯) 2005년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장 (이석범(李錫範)의 차남)
이재형(李載炯, 東烈) 1896(건양 1)∼1961, 독립유공자, 양양 출신. 양양 도천면 도문리에 거주하던 중 아버지 이석범(李錫範)의 지시를 받아 친형 이재훈(李載勳, 能烈,) 등과 함께 1919년 4월 4일부터 9일까지 물치 장터와 대포주재소, 왕도, 기사문 양양 장터 등지에서 군중과 함께 연일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후 체포되어 1919년 4월 23일 강릉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은 후 원산형무소에서 1919년 10월 23일까지 옥고를 치렀다. 2006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매일신보」(1919.5.3),
「이석범공 항일독립운동기실비」, 독립운동사자료집 14(대중투쟁사자료집, 1978). 강원도사 10권 인물 423쪽. 항일독립운동사(Ⅳ),
독립기념관 자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9권 국내3.1운동 (중부.북부)…->,
제3장 강원지역 12. 양양 137, 143쪽에 이재형의 활동 기록.
3). 이석범(李錫範) 독립운동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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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범 대한제국 사령장 | ⋅이국범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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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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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창장 |
3). 이석범(李錫範) 독립운동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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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범 대한제국 사령장 | ⋅이국범 건국훈장 애국장 |
글/사진/ 건호(필선공파) 미국 뉴욕에서
종손가 필선공파 이석범(李錫範) 독립운동가 조명
1) 함풍(함평)이씨 필선공파 독립운동가 이석범
. 이석범(李錫範), 양양 만세운동의 지도자
. 이석범(李錫範)第 이국범(李國範) 2005년 독립유공자 애국장
. 이석범(李錫範)長子 이재훈(李載薰) 1990년 독립유공자 애국장
. 이석범(李錫範)次子 이재형(李載炯) 2005년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창장
2) 이석범 독립운동 약사
가. 이석범(李錫範), 양양 만세운동의 지도자
이석범(李錫範)1859(철종 10)∼1932, 독립운동가, 양양 출신, 자(字) 사일(士一), 호(號) 설초(雪樵), 1919. 3.1 운동시 독립운동 본부를 양양 임천리에 설치 조직하였고 양양지역에서 3·1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왜경에 체포되었다. 양양유림 대표로서 현산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쌍천서숙을 설립하여 후학 양성에도 기여하였다.
이석범(李錫範)은 1919년 3월 1일 고종황제의 인산(因山)에 참례키 위해 양양지역 대표로 일행 10여 명들과 함께 참례하고, 서울 탑골공원의 독립만세시위 현장을 직접 목격한 후 배일사상(排日思想)을 가슴에 품고 독립선언서 등의 문헌을 버선 속에 숨겨 가지고 양양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이석범은 양양지역 총주동자로서 동생 이국범(李國範)과 자기의 두 아들 장남 능열[能烈, 載勳]과 차남 동열[東烈, 載炯]을 표면에 내 세우고 선봉장으로 활동하도록 지시함과 동시에, 젊은 청년들이 배워야 나라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1913년 도천에 설립한 쌍천서숙의 제자들인 졸업생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할 조직을 세웠다. 중도문리는 김영경(金英經)을, 강현면 적은리(積銀里)의 장세환(張世煥)등을 시켜서 물치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토록 지시하고 이석범은 양양지역의 만세운동을 논의하기로 정한 함풍이씨 문중인 이교완 집이 있는 임천리로 왔다.
양양면 임천리로 이동한 총주동자(總主動者) 이석범(李錫範)은 儒林(유림)계의 임천리 계획과 基督敎(기독교) 감리교 계획인 양양면 계획 등 郡(군) 전체계획을 수립 한 후, 김명기(金明基)와 함께 1919년 4월 2일 강원도 양양군 양양면 임천리 이교완(李敎完) 집에서 최인식(崔寅植)을 만나 양양면 읍내 등지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협의하고 최인식은 양양읍의 남부(양양면 거마리등), 김명기(金明基)는 양양읍의 북부(도천면 논산리등)을 담당토록 하고 4월 3일에는 장인원(張仁源)에게 양양군 강현면 적은리 등지의 주민들을 선동하도록 계획을 수립하였다.
1919년 4월 1일부터 임천리 이교정, 이건충의 집에서 옥양목과 백지로 태극기 1,100여개를 만들던 중 동년 4월3일 이교정의 집에서 만들고 있는 사실이 군수 이동혁에게 발각되어 태극기 374매 및 제작도구인 등사기 등을 압수 당하고, 주모급 이석범을 비롯한 22명이 붙잡혀 갔다.
일본관헌에 체포된 이석범(李錫範)은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으로 압송된 후 보안법위반(保安法違反)혐의로 동년 10월 8일 언도한 징역 8월의 유죄판결에 불복하여 공소(控訴)신청 동년 11월 26일 경성복심법원으로부터 원심취소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미결구금(未決拘禁)상태에서 233일(7개월 23일)간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 형무소에서 옥고(獄苦)를 치렀다. 1927년 이석범의 주도 하에 신간회를 창립하여 반일 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선전조직에 활약 하였다. 동생 이국범(李國範)과 아들 이재훈 역시 도천면 중도문리 일대에서 양양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참고문헌】「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 11.26),
강원도사 10권 인물 394쪽. 항일독립운동사(Ⅰ)
독립기념관 자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9권 국내3.1운동 (중부.북부) ->
제3장 강원지역 12. 양양 137쪽,138쪽에 이석범의 활동 기록.
강원도사 10권 인물 394쪽 이석범의 기록은 이석범의 실제 기록과 다르다. 양양의 다른 독립운동가의 활약이 오기 됐다.
나. 이국범(李國範) 2005년 독립유공자 애국장 (이석범(李錫範)의 동생)
이국범(李國範) 1869(고종 6)∼1931, 독립유공자, 속초 출신. 1919년 4월 4일부터 9일까지 양양군 도천면(道川面)과 강현면(降峴面)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지역의 만세운동은 고종황제 인산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지니고 귀향한 이석범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석범(李錫範)은 그의 아우인 이국범(李國範)과 아들인 이능렬(李能烈)을 앞세우고 쌍천학교(雙川學校) 졸업생을 동원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는 유학자로서 평소 일제의 강제병합에 분개하고 있던 중, 고종황제의 서거 소식을 듣고 군내 양반 유생들에게 양양읍 밖에서 요배식(遙拜式)을 거행하도록 하는 등 항일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형으로부터 만세운동 계획을 들은 이국범(李國範)은 이에 적극 참여하여 김영경(金英經)·장세환(張世煥) 등과 도천면과 강현면 주민들을 동원하여 4월 4일부터 9일까지 연 6일 동안 읍내 대포(大浦)·물치(沕淄)·왕도(旺道)·기사문(基士門) 등지에서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7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판결문」(고등법원, 1919.10.11), 「속초시지」(1991),
강원도사 10권 인물 365쪽. 항일독립운동사(Ⅳ),
독립기념관 자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9권 국내 3.1운동 (중부·북부)…
제3장 강원지역 12. 양양 137쪽, 142145쪽에 이국범의 활동 기록.
다. 이재훈(李載薰) 1990년 독립유공자 애국장 (이석범(李錫範)의 장남)
이재훈(李載勳, 能烈) 1888(고종 25)∼1951, 독립유공자, 양양 출신(도천면 중도문리), 이명 능렬(能烈). 1919년 4월 4일 이종국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고 물치장날 독립만세운동을 계획, 5일 물치장터에서 5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도천면 군중과 합세,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재훈은 양양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이석범의 아들로 도천면 중도문리(中道門里)에서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도천면 중도문리 만세운동은 이석범의 동생 이국범(李國範)과 아들 이재훈을 내세워 추진했는데, 재판 판결문에 따르면 이재훈은 정치의 변혁을 목적할 의사가 있어 1919년 4월 4일 밤 양양군 도천면 중도문리 이종국(李鍾國) 방에서 차압된 태극기 2폭을 작성하고 동 이민 수명에 대하여 명 5일 강현면 물치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겠음에 대해서 여기 참가하라고 선동하고, 다음 5일 정오 경 물치시장에서 선동에 응해서 모여드는 군중 수백 명을 지휘하여, 전시 태극기를 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다시 위 군 중을 거느리고 약 20정 거리인 도천면 대포(大浦)경찰관주재소 부근에 이르러 다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또 군중에 대하여‘양양경찰서에서 독립만세를 부를 것이며, 동월 6일은 양양읍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또 구속된 사람을 석방하도록 요구할 터인데 일동도 와서 참가하라’는 취지를 말하고 선동하여 동월 6일 오후 1시 경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양양읍 시장에서 전시 태극기를 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로 인해 징역 1년 8월을 언도받았다.
1982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6.14),
강원도사 10권 인물 424쪽 항일독립운동사(Ⅰ)
독립기념관 자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9권 국내 3.1운동 (중부·북부)…->,
제3장 강원지역 12. 양양 137쪽, 141쪽에 이재훈의 활동 기록.
라. 이재형(李載炯) 2005년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장 (이석범(李錫範)의 차남)
이재형(李載炯, 東烈) 1896(건양 1)∼1961, 독립유공자, 양양 출신. 양양 도천면 도문리에 거주하던 중 아버지 이석범(李錫範)의 지시를 받아 친형 이재훈(李載勳, 能烈,) 등과 함께 1919년 4월 4일부터 9일까지 물치 장터와 대포주재소, 왕도, 기사문 양양 장터 등지에서 군중과 함께 연일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후 체포되어 1919년 4월 23일 강릉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은 후 원산형무소에서 1919년 10월 23일까지 옥고를 치렀다. 2006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매일신보」(1919.5.3),
「이석범공 항일독립운동기실비」, 독립운동사자료집 14(대중투쟁사자료집, 1978). 강원도사 10권 인물 423쪽. 항일독립운동사(Ⅳ),
독립기념관 자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9권 국내3.1운동 (중부.북부)…->,
제3장 강원지역 12. 양양 137, 143쪽에 이재형의 활동 기록.
3). 이석범(李錫範) 독립운동가 사진
⋅이석범 대한제국 사령장
⋅이국범 건국훈장 애국장
⋅이재훈 건국훈장 애국장
⋅이재형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창장
3). 이석범(李錫範) 독립운동가 사진
⋅이석범 대한제국 사령장
⋅이국범 건국훈장 애국장
글/사진/ 건호(필선공파) 미국 뉴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