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대동보 발행과정
함풍이씨 대동보는 수년에 걸쳐 자료를 수집하고 사료적 검증을 거쳤다. 많은 역사적 사료의 검증 결과 함풍이씨 시조는 함풍부원군 휘 광봉(光逢)祖 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전 종친의 대동보 발행결의와 후원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2018년 10월 함풍이씨 대동보가 편찬되었으나 1권에 문헌과 시조방주에 빠뜨린 부분과 오타가 있어 수범(壽範) 종친과 건환(建煥)종친이 11월부터 10여개월 동안 자료를 찾아 고증 및 수정하면서, 대종회 임원 분들과 교정본을 7차례 감수(監修)을 하고, 정수 수석부회장님의 추가 헌성금으로 2019년 9월에 인터넷 족보까지 완성 되었다. 그리고 전국 50여개의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서울대학교도서관, 부천족보박물관, 각 대학교 및 연구소에 기증 완료하였으며, 족보사실록과 이덕일장군 칠실유고집도 재(再)편집하고 발행하여 추가 기증하였습니다.
얼마 전 대종회 임원에게 한통의 전화가 왔는데 부천족보박물관의 전화였습니다. 부천족보박물관은 족보연구학자 분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족보박물관의 말씀이함풍이씨 대동보는 정말 잘 만들었습니다.내용도 알차고 구성도 정말 훌륭합니다. 근거와 진실을 찾아가는 노고에 경의를 합니다. 현재 보관중인 족보 중 훌륭하다고 칭찬을 했다고 합니다. 이는 조상(祖上)을 부풀리지 않고 사실 그대로 족보구성이 잘되었다는 것이다.
족보를 잘 만들었다는 것이 단지 종이 질이 좋다거나 사진을 잘 찍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을 찾아가는 사료에 근거하였고 논리적 합리성과 역사적 증거에 충실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족보 만드는 가치와 이유를 일깨워줘서 잘 만들었다는 겁니다. 전문가의 평가가 훌륭하다고 하니 그동안 모든 종친분 들과 임원 분들께서 노력해 주신 보람이라 생각합니다.
2) 함풍이씨의 대동보 의미(일부 권행(權行)종친 글 발췌)
함풍이씨대종회는 2011년 10월 19일 정부에 등록(등록번호:112999-3163011)했다.
‘함풍이씨 족보’(계유초보, 계묘초보, 무진보)의 변천과정을 살펴보자!
가. 계유초보(癸酉草譜:1633년)-함풍이씨 최초 족보다.
인조(仁祖11년) 계유초보(癸酉草譜) 장양공 종생(從生)의 7세손 득원파 운(澐)공이 서문(序文)을 작성했다. 서문만 전해 내려오고 초보는 종인들에게 전해오지 않는다. 함풍족보의 정의를 첫 문장에 기록했다. 즉“咸豊族譜譜咸豊李氏之族也”라고 기록했다. ≪함풍족보는 함풍이씨 씨족들을 기록한 족보다.≫라고 함풍이씨 정체성을 정확히 명시한 것이다.
나. 계묘초보(癸卯草譜:1663년)-함풍이씨 2번째 족보다.
헌종(獻宗4년) 1663년 장양공 종생(從生)의 7세손 시원파 자(滋)공이 서문을 작성 했다. 역시 서문만 전해 내려오고 초보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언(李彦), 이화(李和), 이상문(李尙文) 외는 달리들은 바 없다. 가승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 무진보(戊辰譜:1688년)-함풍이씨 3번째 족보이나 첫 번째 족보이다.
‘함풍이씨 족보’였다가 무진보로 고쳤다. 2012년 기성군 宗家에서 원본 발견됨. 숙종(肅宗14년) 1688년 장양공 종생(從生)의 8세손 응성파 적길(迪吉)공이 서문을 작성했다. 당초‘함풍이씨 족보’였던 것을 회수하여 태워버리고‘무진보’로 고치고 이후부터‘함평이씨 족보’로 둔갑했다. (보청에서 지금의 함풍부원군 손(孫)들이 언성을 높여 반발하고 합보 거부했다.)
o. 무진보 수보당시 휘 인문(仁問)祖 후손 휘 유인(有仁)이 휘 광(光)자 봉(逢)자 할아버지를 1世로 할 수 없다고 하자 죽음공 후손 휘 익경(益慶)공이 화를 내며 다투다가 명첩단자를 놔둔 채 돌아 왔다. 이후로 부원군 후손인 함풍이씨는 함평이씨와 대동보를 같이 한바가 없다.
o. 시조(始祖)를 변경 - 당초 시조는 이광봉(李光逢)이던 것을 이언(李彦)으로 둔갑시켜 진짜 시조 함풍부원군 휘 광봉(光逢)祖를 버리고 무진보(1688년)에는 별보시조로 맨 뒤쪽에 기록 했다가 그 다음 족보부터 300년이 넘도록 이순지(李順之)의 아들이자 이림(李琳)의 동생으로 기록하였다.
o. 무진보는 부안본(인관파 종손)과 홍성본(인원파 종손)으로 두 본이 있다.
o. 무진보 원본을 2012년 광주 기성군 家에서 발견하였다.
표지에 또렷이‘咸豊李氏族譜(함풍이씨족보)’라고 쓰여 있다.
o. 휘 손수(孫秀)祖 방주에“초보에 인문(仁問)은 광봉(光逢)을 선대(先代)로 하고 손수(孫秀)를 아들로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문장에서 光逢이란 글씨를 긁어서 지웠으나 원본에는 뚜렷이 光逢이란 글씨가 선명하다. - 족보의 조작이란 방증
o. 계묘초보에 언급이 없던 이순지(李順之)가 무진보에 이림(李琳)의 아버지로 등장
o. 이순지의 방주(傍註)와 개성왕씨(開城王氏) 방주가 일치함-개성왕씨 방주에 이순지는 고려가 망하고 한조인(韓朝人)인 ≪왕(王)씨 성을 버리고 살다 다시 왕씨로 돌아오신 분≫ 충익(忠翼)의 사위임이 밝혀졌다. 임술보(壬戌譜:1742년)에 충렬왕 때 벼슬을 한 휘 광봉(光逢)祖가 고려가 망하고 한조인이된 왕충익(王忠翼)의 사위 이순지의 둘째아들로 기록되었다. - 이 기록이 확인됨에 따라 함평이씨 족보가 조작된 족보임이 밝혀졌다.
o. 1代부터 10代까지는 대수를 기록하되 자(子)자는 쓰지 않았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원래 본관(本貫)은 함풍이씨(咸豊李氏)였는데 무진보(戊辰譜:1688년)이후 아무런 이유 없이 함평이씨(咸平李氏)로 바꿔졌다. 이번에 발간된 함풍이씨 대동보는 함풍부원군 휘 광(光)자 봉(逢)자 할아버지를 시조(始祖)로 모신 최초의 함풍이씨(咸豊李氏) 대동보(大同譜)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전 宗親어르신들의 뜨거운 성원과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글/ 昌範(창범) 교수공파/ 함풍이씨 대종회장
1) 대동보 발행과정
함풍이씨 대동보는 수년에 걸쳐 자료를 수집하고 사료적 검증을 거쳤다. 많은 역사적 사료의 검증 결과 함풍이씨 시조는 함풍부원군 휘 광봉(光逢)祖 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전 종친의 대동보 발행결의와 후원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2018년 10월 함풍이씨 대동보가 편찬되었으나 1권에 문헌과 시조방주에 빠뜨린 부분과 오타가 있어 수범(壽範) 종친과 건환(建煥)종친이 11월부터 10여개월 동안 자료를 찾아 고증 및 수정하면서, 대종회 임원 분들과 교정본을 7차례 감수(監修)을 하고, 정수 수석부회장님의 추가 헌성금으로 2019년 9월에 인터넷 족보까지 완성 되었다. 그리고 전국 50여개의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서울대학교도서관, 부천족보박물관, 각 대학교 및 연구소에 기증 완료하였으며, 족보사실록과 이덕일장군 칠실유고집도 재(再)편집하고 발행하여 추가 기증하였습니다.
얼마 전 대종회 임원에게 한통의 전화가 왔는데 부천족보박물관의 전화였습니다. 부천족보박물관은 족보연구학자 분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족보박물관의 말씀이함풍이씨 대동보는 정말 잘 만들었습니다.내용도 알차고 구성도 정말 훌륭합니다. 근거와 진실을 찾아가는 노고에 경의를 합니다. 현재 보관중인 족보 중 훌륭하다고 칭찬을 했다고 합니다. 이는 조상(祖上)을 부풀리지 않고 사실 그대로 족보구성이 잘되었다는 것이다.
족보를 잘 만들었다는 것이 단지 종이 질이 좋다거나 사진을 잘 찍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을 찾아가는 사료에 근거하였고 논리적 합리성과 역사적 증거에 충실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족보 만드는 가치와 이유를 일깨워줘서 잘 만들었다는 겁니다. 전문가의 평가가 훌륭하다고 하니 그동안 모든 종친분 들과 임원 분들께서 노력해 주신 보람이라 생각합니다.
2) 함풍이씨의 대동보 의미(일부 권행(權行)종친 글 발췌)
함풍이씨대종회는 2011년 10월 19일 정부에 등록(등록번호:112999-3163011)했다.
‘함풍이씨 족보’(계유초보, 계묘초보, 무진보)의 변천과정을 살펴보자!
가. 계유초보(癸酉草譜:1633년)-함풍이씨 최초 족보다.
인조(仁祖11년) 계유초보(癸酉草譜) 장양공 종생(從生)의 7세손 득원파 운(澐)공이 서문(序文)을 작성했다. 서문만 전해 내려오고 초보는 종인들에게 전해오지 않는다. 함풍족보의 정의를 첫 문장에 기록했다. 즉“咸豊族譜譜咸豊李氏之族也”라고 기록했다. ≪함풍족보는 함풍이씨 씨족들을 기록한 족보다.≫라고 함풍이씨 정체성을 정확히 명시한 것이다.
나. 계묘초보(癸卯草譜:1663년)-함풍이씨 2번째 족보다.
헌종(獻宗4년) 1663년 장양공 종생(從生)의 7세손 시원파 자(滋)공이 서문을 작성 했다. 역시 서문만 전해 내려오고 초보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언(李彦), 이화(李和), 이상문(李尙文) 외는 달리들은 바 없다. 가승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 무진보(戊辰譜:1688년)-함풍이씨 3번째 족보이나 첫 번째 족보이다.
‘함풍이씨 족보’였다가 무진보로 고쳤다. 2012년 기성군 宗家에서 원본 발견됨. 숙종(肅宗14년) 1688년 장양공 종생(從生)의 8세손 응성파 적길(迪吉)공이 서문을 작성했다. 당초‘함풍이씨 족보’였던 것을 회수하여 태워버리고‘무진보’로 고치고 이후부터‘함평이씨 족보’로 둔갑했다. (보청에서 지금의 함풍부원군 손(孫)들이 언성을 높여 반발하고 합보 거부했다.)
o. 무진보 수보당시 휘 인문(仁問)祖 후손 휘 유인(有仁)이 휘 광(光)자 봉(逢)자 할아버지를 1世로 할 수 없다고 하자 죽음공 후손 휘 익경(益慶)공이 화를 내며 다투다가 명첩단자를 놔둔 채 돌아 왔다. 이후로 부원군 후손인 함풍이씨는 함평이씨와 대동보를 같이 한바가 없다.
o. 시조(始祖)를 변경 - 당초 시조는 이광봉(李光逢)이던 것을 이언(李彦)으로 둔갑시켜 진짜 시조 함풍부원군 휘 광봉(光逢)祖를 버리고 무진보(1688년)에는 별보시조로 맨 뒤쪽에 기록 했다가 그 다음 족보부터 300년이 넘도록 이순지(李順之)의 아들이자 이림(李琳)의 동생으로 기록하였다.
o. 무진보는 부안본(인관파 종손)과 홍성본(인원파 종손)으로 두 본이 있다.
o. 무진보 원본을 2012년 광주 기성군 家에서 발견하였다.
표지에 또렷이‘咸豊李氏族譜(함풍이씨족보)’라고 쓰여 있다.
o. 휘 손수(孫秀)祖 방주에“초보에 인문(仁問)은 광봉(光逢)을 선대(先代)로 하고 손수(孫秀)를 아들로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문장에서 光逢이란 글씨를 긁어서 지웠으나 원본에는 뚜렷이 光逢이란 글씨가 선명하다. - 족보의 조작이란 방증
o. 계묘초보에 언급이 없던 이순지(李順之)가 무진보에 이림(李琳)의 아버지로 등장
o. 이순지의 방주(傍註)와 개성왕씨(開城王氏) 방주가 일치함-개성왕씨 방주에 이순지는 고려가 망하고 한조인(韓朝人)인 ≪왕(王)씨 성을 버리고 살다 다시 왕씨로 돌아오신 분≫ 충익(忠翼)의 사위임이 밝혀졌다. 임술보(壬戌譜:1742년)에 충렬왕 때 벼슬을 한 휘 광봉(光逢)祖가 고려가 망하고 한조인이된 왕충익(王忠翼)의 사위 이순지의 둘째아들로 기록되었다. - 이 기록이 확인됨에 따라 함평이씨 족보가 조작된 족보임이 밝혀졌다.
o. 1代부터 10代까지는 대수를 기록하되 자(子)자는 쓰지 않았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원래 본관(本貫)은 함풍이씨(咸豊李氏)였는데 무진보(戊辰譜:1688년)이후 아무런 이유 없이 함평이씨(咸平李氏)로 바꿔졌다. 이번에 발간된 함풍이씨 대동보는 함풍부원군 휘 광(光)자 봉(逢)자 할아버지를 시조(始祖)로 모신 최초의 함풍이씨(咸豊李氏) 대동보(大同譜)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전 宗親어르신들의 뜨거운 성원과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글/ 昌範(창범) 교수공파/ 함풍이씨 대종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