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이씨의 족보의 실상 (咸平李氏 族譜의 實狀)은 이렇다

이길현
2019-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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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平李氏 族譜의 實狀은 이렇다


咸豊李氏大宗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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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平李氏 族譜의 實狀은 이렇다


함평이씨 대종회는 우리가 발송한 함평이씨 보체(譜體) 건의서에 대하여 사실 무근이고 허위사실이라고 했다. 과거 뿌리연구회 5사람이 함이(咸李) 족보(族譜)를 가지고 거론하지 말자고 다짐하였고(1988년 11월에 서울 뿌리연구회가 이강수 종인이 발족함.) 특히 10년에 걸쳐 이강수(李康洙) 종인(宗人)이 경비를 조달하면서 치밀하게 연구 조사한 결과 특별한 하자가 없음으로 2002년 4월에 함평이씨 대종회를 방문 실토하고 연구자료 일체를 대종회에 인계 한 바가 있다.


위 5인은 함성군파 이교헌(李敎憲:파종회장), 평택 태교공파 이명헌(李明憲), 부원군후손 이내범(李來範), 함성군파 이기범(李起範), 부원군후손 이강수(李康洙) 종인이며 추후 참여한 분으로 부원군후손 강원도 이시행(李時行), 부원군후손 이건영(李建榮) 등이시다.


위 분들은 족보가 개선 될 때까지 대동보 합보(合譜)를 거부했다.(1988년 대동보) 현재 서울시 강남구에 거주하시는 발기인 이강수(李康洙) 종인은 위 사실 중 족보에 하자가 없다고 실토했다는 부분과 연구자료 일체를 함평이씨 대종회에 항의하고 있음을 볼 때 함평이씨 대종회는 억지로 사실을 은폐하려 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우리가 발송한 문적(文籍)이 사실무근이며 허위사실을 적나라하게 기술했다는 부분에 대하여 그 사실을 아래와 같이 근거를 제시코자한다.


함풍부원군 이광봉(고려 충렬왕원년 1275년에 출사(出仕)하시고 충숙왕 11년 삼사사<三司使:1324년>함풍부원군에 봉함)祖의 선대조(先代祖)라는 이언(李彦),-이화(李和),-이상문(李尙文),-이순지(李順之)祖 가 고려사와 이조실록 등에 기록된 역사적 내력을 살펴보고 함이(咸李)족보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원문을 제시하여 증거 하고자 한다.


휘(諱) 광봉(光逢)祖는 고려국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위대한 함풍이씨의 인물이며 고려시대 선조(先祖) 중 고려사에 처음으로 기술되었다.(고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1633년 계유초보(癸酉草譜)와 1663년 계묘초보(癸卯草譜)에는 이광봉(李光逢)을 시조(始祖)로 하는 족보를 편수(編修) 했으나 무진보(戊辰譜:1688년)에서는 이언(李彦)을 시조로 하고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 휘 광봉(光逢)조를 별보(別譜)로 편수했다. 함평이씨 대종회는 우리의 건의서에 대한 반박문에서 상계세계고찰(上系世系考察)이란(14쪽, 37쪽) 도표에서 아래와 같이 추정한다고 정리했다.


이언(李彦)-210년→이화(李和)-30년-子이상문(李尙文)-42년-子이순지(李順之)-20년- 子이림(李琳)

-64년- 子이광봉(李光逢)

대한민국 어느 성씨가 “子” 字없는 시조를 모시고 있단 말인가? 이언(李彦)을 고무줄 늘리듯이 500년을 늘려 임의로 고려(高麗) 광종(光宗)때 사람이다. 태조(太祖)때 사람이다. 하고 꾸며 맞출 수 있는가? 없는 인물을 무엇을 기준으로 계상하여 합리화 시켰는가? 말 할 것도 없이 이는 부동의 역사적 인물 이광봉(李光逢)祖의 연대를 참고했다. 이것이 이언이 시조가 아니라는 결정적 증거다.


아버지를 모르는데 할아버지를 알 수 없고,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를 모르는데 고조할아버지를 알 수 있겠는가? 하물며 210년 전의 할아버지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기록이 되었다면 기록한자가 있을 것이 아닌가? 210년 후의 이화(李和)라는 분이 기록했단 말인가? 아무리 임진(壬辰), 정유왜란(丁酉倭亂)시 증물(證物)이 소실되었다 하더라도 위 도표에서와 같이 이언(李彦)을 시조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언(李彦)과 이화(李和), 이순지(李順之)는 고려 말 조선 초기 사람으로 추정컨대 가승보(家乘譜) 작성시 사람으로 하여금 조종하여 임의로 기록하여 무진보소(戊辰譜所)에 제출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고현 가승과 옥천 가승이 꼭 같다고 한다면 연(延:광봉의 아들)祖에 이림(李琳)이 연행우서(連行偶書) 불서관함(不書官銜)으로 적혀 있다면 휘 광봉(光逢)祖의 아들이거나 사위일 것인데 어찌 이광봉祖보다 44세 많은 형으로 기록 되었는가? 특히 이림(李琳)은 이광봉 후손(이주삼:李柱三)의 가승(家乘)에서 나왔다면 이광봉의 후손(後孫)이 아닌가? 이를 이광봉祖의 형으로 기록했다면 가승보는 신문(信文)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또한 조선 숙종 14년, 함풍이씨 경향제종(京鄕諸宗)이 같이 족보하기로 발의하고, 세계(世系)를 논의해서 정하려는 때에, 족보 일을 주관하는 효우공파 손(孫)의 평릉파(平陵派) 종인 참봉 유인(有仁)이 말하기를 “함풍부원군은 권한공과 더불어 고려사에 권간(權奸:권세를 남용한 신하)으로 지목되어 종문에 누가 되니 부원군을 1세로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자, 이익경(李益慶)과 이신(李藎)은 “부원군은 충숙왕 때에 삼사사에 제수되신 것을 보면 권간의 무리와는 다르다”며, “설사 권간에 이름이 있다 한들 자손으로서 조상에게 어찌 의심을 전하겠는가? 더욱이 틀림없는 조상을 조상으로 하지 않는 족보는 같이할 수 없다”고 자리를 떠났다. 참봉 유인이 기1세로 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발설한 것을 보면 초보에는 광봉祖가 시조(始祖)로 등재되었음을 방증한다. 그래서 역사적 문헌(文獻)이고 객관적 기록인 고려사(高麗史)를 근거로 그 허구성을 밝혀보기로 한다.


1. 이언(李彦)-(고려말-조선초기)

이언은 고려 말 조선 초기 사람으로 이성계(李成桂)를 받들었고 이방원(李芳遠)과의 전투에서 이성계가 패하자 사직(司直) 황상렴(黃尙廉)에 붙들려 1411년 윤 12월에 살해되었고(伏誅) 그 아들 3형제는 참형에 해당하나 한 등급을 감형 받았다.


이언은 왕을 사양한 이성계를 모시고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이방원에 패하자 10년간을 도피하다 고려의 충신 이조의 반역자로 처형되나 그의 아들 3형제는 목숨만은 부지하였다 한다.

나머지 고려 대신들은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여 조선에 출사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두문동:고려말 충신들이 이씨조선에 출사하지 않고 깊은 산골에 은거했다는 장소로서 함평이씨 족보 이림(李琳)의 방주에도 기록 되었다.)


근거 1 :고려사 권(卷) 137장 17~18절

17절 마지막부분(원문)-諸軍士皆賀鎭撫李彦出跪曰陪我(제군사개하진무이언출궤왈배아)=진무장군 이언이 나와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18절 처음부분(원문)-令公 往何處不可行乎(영공 왕하처불가행호)=우리 영공(이성계)을 모시고 가면 어느 곳엔들 가히 가지 못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근거 2 :조선 태종 공정대왕실록 제22권(1411년 윤 12월)

원문: 李彦伏誅其子三人當斬其知情不首者當絞命皆减一等知情不首者依趙順和例(이언복주기자삼인당참기지정불수자당교명개감일등지정불수자의조순화예)=이언이 복주 되었다. 그 아들 3인은 참형에 해당하고 정상을 알고도 자수하지 않은 자는 교형에 해당하였으나 명하여 모두 등급을 감하게 하고 정상을 알고도 자수하지 않는 자는 조순화의 예에 의한다.


태종실록 19권 (명나라 영락8년 1410년 1월 6일 계유)

원문: 仲明張貴减杖二十仲明彦之子也(중명장귀감장이십중명언지자야)=중명과 장귀는 곤장 20대를 감하였는데 중명은 이언(李彦)의 아들이다. 이언은 태종실록에 11번 나오는 고려조 정2품 종3품의 진무장군(鎭撫將軍)이다. 위 사실에서 이언은 고려 말 조선 초기 사람으로 진무장군이언을 그 자손이 신무위장군으로 보소에 잘못 제출 했지 않았나? 추정되며 평택 이명헌(李明憲) 종인이 서울시 중구 저동 안중학원 사무소에서 말하기를 “이언은 우리 평택 인계후손(仁桂後孫)의 중시조(中始祖)다” 라고 공표(공언)했다.


이 근거는 이렇다. 이언의 아들 3형제는 중명(仲明), 중길(仲吉), 중보(仲寶), 이며 당시 조선사회에서 실명을 사용할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므로 이언(李彦)은 이온(李氳)으로 3형제중 중명(仲明)외 2형제는 중길(仲吉)은 중길(中吉)로 중보(仲寶)는 중보(中寶)로 함평이씨 족보에 인계(仁桂)祖 후손(後孫)으로 기록했다.


<중길(中吉)은 1688년 무진보(戊辰譜)에, 중보(中寶)는 1807년 정묘보(丁卯譜)에 수록됨> 중길(中吉)은 개경을 피하여 평택 은골에 거주하였고 후손들은 지금도 중길祖가 은거하게 된 연유를 조선 건국시 온(氳)祖께서 화를 당하시자 아들 중길祖가 개경을 피하여 평택시 포승면 내기리 은곡으로 피신 은거하셨다고 전한다는 내용으로서 결국 이언은 함평이씨 시조가 아니라 인계祖의 아들로 평택종가(平澤宗家)의 중시조(中始祖)다.


안중학원 이사장이신 이명헌(李明憲) 종인(宗人)의 말이 정확히 맞는 말이다. 여말선초 사람인 이언(李彦)을 500년 끌어올려 고려태조 때 인물인 함평이씨 시조로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


2. 이화(李和)- (고려말-조선초기)

이화는 고려사 권43-2 공민왕 6년에 대장군 벼슬을 했다!


근거 : 고려사 권43-2 공민왕 6년

원문:庚午幸長湍謁靖陵命大將軍李和率工人乘舟中流奏伎樂王觀之樂焉(경오행장단알정능명대장군이화솔공인승주중류주기락왕관지락언)=경오에 장단(황해도 장단면)에 행차하여 정능에 배알하고 대장군 이화에게 명하여 공인을 거느리고 중류에 배를 타고 왕이 재주 곁들인 풍악을 관전하고 즐거워하니.... 중략


이화(李和)는 여말선초 사람으로서 함평이씨는 이화를 시조 다음 2세로 족보(族譜)는 기록했다.

(이언-이화)까지 1대(一代)가 무려 210년이다.


3. 이상문(李尙文)-(고려 21대 희종때 사람;1205년생)

이상문祖는 무진보에 신호위대장군으로 부인은 함풍노씨로 아버지가 정조호장 노용신(魯龍臣)으로 재록 되었다.


연대를 기록을 상고하면

장인이 중국송나라 효종순희2년 고려명종 을미생(乙未生)이면 1175년생이고, 장인의 아버지가 송나라 고종19년 고려의종 기사생(己巳生)이면 1149년생이고, 장인의 조부(祖父)가 송나라휘종 정화3년 고려예종 계사생(癸巳生)이면 1113년생이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이상문(李尙文)祖는 1205년생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강화노씨세거해동록(江華魯氏世居海東錄)과 세보(世譜), 충숙공파보(忠肅公派譜)에도 이상문의 장인이 43世 용신(龍臣)으로 재록되었다.


4. 이순지(李順之) -(세조실록 제47권)

이순지는 고려말 사람으로 조선조에서는 승문원교리 안평대군과 친분이 있다하여 수양대군인 세조에 의하여 관직이 삭직된다. 호남에 거할 때 계유정난 때 피살된다. 호남은 이광봉(李光逢) 선조(先祖)의 후손(後孫)이 거하고 있는 지금의 함평이다.


개성왕씨(開城王氏) 족보에 이순지(李順之)는 충익(忠翼)의 사위로 기록되고 우리 함평이씨 족보에 기록된 방주(傍註)를 대비하면 정확히 맞는다. 이 개성왕씨 족보를 분석하면 이순지가 정확히 이광봉祖의 아버지가 아님을 개성왕씨 족보(族譜)와 세보(世譜)의 종족별기(宗族別記)와 조선 세조실록 제47권에 근거를 제시하여 확증토록 해보면 아래와 같다.



원문을 국역을 하면 아래와 같다.

王之嫡長繼世爲王與旁支入承大統者譜之爲聖源錄其別子之系世爲宗者譜之爲宗族記是義例之固然而舊譜殽然無分今略加釐正而猶未盡云

公族之世系不傳者謂之宗族別記而高麗亡後其子孫之爲韓朝人者並載之亦非其例之正姑仍其舊但舊譜皆書姓某者今盡削去代以諱某云=


<왕의 본처소생의 장손으로 대를 이어 왕이 된 자와 또 본처에서 갈려나가도 대통을 이은자가 기록된 족보를 성원록이라 하고 그 나머지 자손은 대대로 종친이 되어 족보에 기록한 것을 종족기라 한다.

이 성원록과 종족기라는 의례가 항상 그러해서 옛날족보라는 것이 어지럽게 섞여 분별되지 아니하므로 이제 대략 개정했으나 오히려 미진함이 있다. 종족기에 세대와 계통이 전하지 아니한 것을 이르되 종족별기라 하는데 이는 고려가 망한 후 한조인(韓朝人:全, 玉, 田)이 된 자들을 같이 재록하는 것은 또한 그 예가 바르지 아니한 고로 잠시 그 옛것을 따라했다. 구보(舊譜)는 다 그 성씨가 ‘전씨’ ‘옥씨’ ‘전씨’ 등등 이라고 기록했으나 이제 그 성을 빼버리고 이름과 몇 대인가 만을 기록했노라.>

한마디로 종족별기는 왕씨 자손으로 고려말에 생명을 부지하려는 절치부심으로 성을 바꾼 분들이다. 이는 모두 왕손이다. 시대가 고려 말이라는 것을 웅변한다. 이와 같이 이순지는 고려말 충익의 사위였고 드디어 세조 때 죽임을 당했다.


함평이씨 족보에 이순지는 검교흥위위대장군(檢校興威衛大將軍)이라 적고 부인은 개성왕씨 왕충익의 딸과 결혼했다고 적었다. 개성왕씨 족보에도 왕충익의 딸이 함풍인 검교흥위위 대장군 이순지의 부인 이라고 똑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함평이씨 족보에 이순지 장인의 세계는 왕충익(王忠翼)→ 부(父):왕계창(王繼昌)→ 조부(祖父):왕섬(王暹)이다. 라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으나 문제는 시대와 연대의 기록이다.


개성왕씨 족보의 위 기록대로 세계(世系) 선대(先代)의 시대와 연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휘 순지(順之)祖의 처 증조부 섬(暹)과 동 항렬인

▸승보(承寶): 조선태조 3년(1395년)에 영흥으로 갔고

▸승귀(承貴): 조선태조 3년에 합포로 갔으며

▸백안(伯顔): 조선태조 6년(1398년)에 피주(被誅)됨./목메어 죽음

▸연금(延金):조선태조 6년에 피주됨.


처(妻) 증조부(曾祖父) 휘 섬과 같은 항렬인 승보, 승귀, 백안, 연금은 모두 조선 태조 때 인물이며 1390년대 인물들이다. 섬(暹)의 증손 사위(曾孫壻) 이순지(李順之)는 아무리 빨라도 1420년 이후 인물이라야 맞다. 마찬가지로 휘 광봉祖와 휘 순지祖의 선후(先後)차이도 7대(7세)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순지는 계유정란(癸酉靖亂) 시 난적으로 세조실록에 나오며, 또한 이현로의 숙부로도 기록된다. 과연 어느 족보가 참이고 어느 족보가 거짓일까요?


억지로 이언(李彦)이 동명이인(同名異人)이라 하고 이화(李和)가 동명이인 이라고 하더라도 이순지(李順之)가 정확히 위와 같이 이광봉(李光逢)祖의 후대라면 이언과 이화는 함평이씨의 선계(先系)가 아니다 라는 또 하나의 부동의 확실한 증거이다. 고려 태조 때 이언을 시조로 4代가 조선 세조실록에 등장하는 이순지까지 500년을 4대독자(290년 동안)로만 내려왔단 말인가? 맹신은 금물이다.


6. 이림(李琳)-(고려사에 없는 인물)

함평이씨 족보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현가승에 이광봉(李光逢)祖의 아들이신 이연(李延)편에 연행우서(連行偶書: 아들, 사위)라 기록되고 불서관함(不書官銜: 무슨 벼슬을 했는지 모른다)라 했다.


함평이씨 파보수편(派譜首編) 이림(李琳)의 방주(傍註)에 기록하기를,

五世 李琳 初諱密材文科尙衣直長同正 配靈巖朴氏父神騎軍朴大冲祖同正之夢曾祖仁勇校尉永峻外祖神騎軍咸平魯氏光習按公牟平府院君三字 昭載杜門洞九忠錄 故今譜修整焉=

5세 이림 초휘는 밀재 문과 상의직장동정 배위는 영암박씨이고, 부(父)는 신기군 박대충(朴大冲)이며, 조(祖)는 동정 지몽(之夢)이고, 증조(曾祖)는 인용교위 영준(永峻)이며, 외조(外祖)는 신기군함평노씨광습(光習)안공모평부원군삼자이다. 소재두문동구충록고금보수정언(이림이 두문동 아홉충신의 기록한 책에 확실하게 재록되어 이제 족보를 수정한다.) 라고 되었다. 여말선초 고려 대신들은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여 조선에 출사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두문동: 고려말 충신들이 이씨조선에 출사하지 않고 깊은 산골에 은거했다는 장소로서 함평이씨 족보 이림(李琳)祖의 방주에 기록 되었다.-杜門洞



고려말에 두문동 거주9충신중의 이림(李琳)은 1391년에 졸(卒)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고성이씨 교의 아들로 우왕의 장인이며 창왕의 외조부로 철성 부원군이 된 사람이다. 위에 기재한 바와 같이 함평이씨 족보(수편) 방주에 두문동(杜門洞) 구충록(九忠錄)에 기재되었다고 나온다. 두문동 72현이란 말도 고려말엽 에서만 회자 되는 단어다. 한마디로 시종 그러므로 고려 말 고성이씨 이림이 함평이씨 족보 5세인 이림이 정확히 맞다. 함평이씨 족보 이림의 방주에 두문동 구충록에 기재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거 한다. 이림외에 다른 이름의 기록이 없다.

도대체 함평이씨 족보(수편)에 기록한 이림이 고려 말 두문동에 9충신의 한사람이라고 수정한다. 라고 하면 함풍이씨 시조 휘 광봉祖가 함평이씨 이순지의 아들과 이림의 아우로 되어있는데 이것이 금석지문(金石之文)인가? 어떻게 고려 말과 조선 초기 이순지, 이림, 이언의 후손이 될 수가 있을까? 이림은 이광봉祖의 형이 될 수 없다는 확실한 증거다.

사마방목(司馬榜目:생원진사시)에 이림(李琳)이 또 나온다.

영조(英祖 44년) 무자(戊子:1768)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 27위


이분은 이긍(李兢:기성군)祖의 12세손이다.

긍(兢) →숙문(叔汶) →희(熹) -계인(繼仁) →윤무(允武) →경수(鯨壽) →방필(邦弼) →함일(函一) →정휘(挺彙) →인삼(仁三) →숙빈(淑馪) →태오(泰五) →림(琳) =족보에 휘 검(檢)으로 바꿈.


이림(李琳)은 자(字)가 태필(台弼)이며 영조(英祖 9년) 계축(癸丑:1733년)출생으로 기성군(箕城君) 이긍(李兢)祖의 12세손이다.


위의 족보 1688년 무진보(戊辰譜)에 효우공(孝友公) 이접(李慴)의 10世孫 이며 부(父)가 자신(自新)이고, 조(祖)는 유성(有成)이다.

이와 같이 족보에 재록된다면 족보상 5世인 이림(李琳)의 후손으로서 다시 명(名)을 한자를 같이 쓰는 이림(李琳)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는 양반이라면 기휘(忌諱)에 걸린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림(李琳)은 신문할 수 없는 인물로서 이광봉祖의 윗대라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이상 부동의 역사적 기록으로 우뚝 솟은 분은 이광봉祖이시다. 함평이씨 모두가 이분(광봉)의 자손(子孫)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고현가승에 휘 광봉(光逢)祖의 아들이신 이연(李延)편에 연행우서(連行偶書: 아들, 사위)라 기록되었다면 이연(李延)祖와 형제이던가 아니면 함평이씨가 아니라면 고성이씨가 되어야 맞지 아니한가?


그래서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현손이신 영의정 정호대감은 “咸平之李自高麗密直司事光逢始顯本-함평이씨는 고려밀직사사 광봉으로부터 처음으로 본관이 나타났다.” 고 칠실(漆室:이덕일 장군) 묘지명에 기록했다 즉 無非府院君之後孫也라 이광봉 부원군 자손이 아닌 자가 조선 천지에 없다는 말이다. 정호대감이 거짓말을 했다는 말인가?


대개의 함평종인들이 족보에 눈이 어둡다하여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알려주기를 바란다. 사실을 은페 하려는 데에서 의혹이 솟는다 이는 모든 종인을 무시하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6. 족보분석

함평이씨 대종회는 반박문 34쪽에서 1807년도 정묘보에 수록된 함평이씨 족보 범례와 함평이씨 족보변의를 대비표로 제시했다.


이림(李琳)은(출생하고 사망한 년도를 보면)당초 1262년생 1336년 사망(卒)을 → 고치기를 1202년생 1276년 사망으로 이요(李堯)는 당초 1307년생 1336년 사망을 → 고치기를 1242년생 1276년 사망으로 인관(仁琯)은 당초 1336년생 1312년 사망을 → 고치기를 1276년생 1312년 사망했다.

위를 자세히 보면 이요(李堯)가 사망하던 해에 인관(仁琯)이 출생했다면

인관의 아우인 인계(仁桂), 인검(仁檢), 인문(仁問)祖는 함평이씨가 아니란 말인가? 또한 이림(李琳)이 1202년생이라면 선계인 이상문祖가 1205년생으로 추정되어 손자인 이림이 3살 위다. 즉 손자가 할아버지보다 3살 위다. 이런 족보가 금석지문인가?


#. 9세 휘 자보(自寶) 참의공의 호구연갑은 무진보(1688년)에는 호구(戶口) 부여되지 않았다. 임술보(1742년)에 호구의 변의를 하면서 자보 참의공의 호구를 1347년에 출생하여 1405년(58세)에 사망했다고 재록했다.

자보공의 호구가 1347년생이라고 하고 아버지인 현우(玄雨)공의 호구가 自此以後(자차이후) 入我朝(입아조)라 기록되어있어 1392에 출생하였다고 보면 아들 자보가 아버지 현우보다 44세 연상이다. 아버지보다 자식이 나이가 많은 경우가 있는가?


#. 또한 휘 자보(自寶)공의 장자인 현감공 휘 이(貽)의 말할 것도 없고 둘째아들인 함성군 이극해(李克諧) 공의 호구가 1431년이니 아버지 자보공이 사망(1405년) 후 26년 만에 태어났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 10세 휘 극명(克明)공의 호구를 보면 1388년생으로 호구를 변의하고 형인 극해(克諧)공의 호구를 1431년생으로 둔다면 형제가 뒤바뀐 것이 아닌가.

형;이극해(李克諧)-1431년생,

아우; 이극명(李克明)-1388년생 * 어느분이 형이란 말인가?


#. 휘 극명공의 10대손 휘 경철(景喆)공의 작성 전래한 가승보(家乘譜)에 의하면 휘 극명공은 영종정통13년 무진(1448년)에 출생하여 경태갑술(1454년)에 졸(卒)한 것이라면 6세의 어린나이에 사망한 것이 된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들이 없지 않은가? 함평이씨 대종회 반박문을 보면 극해(克諧)공과 극명(克明)공은 자보(自寶)가 아버지가 아니다. 즉 생부가 없는 실계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조상을 흠집 내는 것이지 우리가 흠집 낸다고 반박할 수 있는가?



#. 함평이씨 족보에 이긍(李兢)祖의 선계(先系)는 부(父)→춘수(春秀), 조(祖)→삼길(三吉), 증조(曾祖)→번(蕃), 고조(高祖)→인문(仁問)이라 했는데 위 국조방목에 의하면 기성군(箕城君) 이긍(李兢)祖의 부(父)에 계선(繼先), 조(祖)에 지화(之華), 증조(曾祖)에 인검(仁檢)이라 명기되어 이긍(李兢)은 휘 인검(仁檢)공의 증손(曾祖)인데 어떤 이유로 족보에휘 인문(仁問)공의 고손(高孫)으로 기록되었는가?



기성군 이긍(李兢)祖에 대한 선계(先系) 기록에 대하여 국조방목과 다르게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함평이씨 족보는 어떤 이유로 잘못 기록되었는지는 몰라도 국가 기록물인 등과록의 기록과 일치함에 이긍(李兢)祖의 선계기록을 바로 잡아야 한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상고(詳考)를 건의 했던바 자손으로서 올바른 족보를 원하므로 투명하게 재록하되 의혹된 부분은 이유를 명기하여 후대에 재고토록하고 상고하면 명실상부한 자랑스런 족보가 되리라 믿는다.


정보화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은 감출래야 감출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한자를 모르는 세대라고해서 “기성군이 인검祖 자손인데 인문祖 아래, 그것도 한 대(一代)를 낮춰서 11세로 되어있는 것과 대교공의 선계 또한 1688년도 무진보(戊辰譜)를 수보(修譜)하던 경파와 향파에서 함풍부원군 휘 광봉(光逢)祖를 별보(別譜) 시조(始祖)로 만들면서 선계를 흐트려 놓았다. 그러나 손수(孫秀) 방주(傍註)에 인문(仁問)은 선대(先代)가 광봉(光逢)이며 아들이 손수라고 쓰인 것” 을 없애기 위해 지우고 표지를 함풍이씨족보(咸豊李氏族譜)에서 무진보(戊辰譜)라고 고쳐 많은 종인(宗人)들에게 배포 하였으나 이 무진보 원본이 나타나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함풍이씨족보(咸豊李氏族譜) 무진보(戊辰譜) 표지와 손수(孫秀)祖 방주(傍註)의 원본이 아래와 같다.

무진보 1688년 원본 표지


손수조 방주            

                                                                    

방주 확대


위 방주(傍註)에서 “함평 종인(宗人) 초보(草譜)에 仁問(인문)은 휘 광봉(光逢)祖을 先代(선대)로 하고 襄(양)과 三言(삼언)이(二代) 없이 編考(편고)된 것을 諸宗(제종)의 考證(고증)에 따라 수정하였다고 載錄(재록)하여 疑系(의계)를 밝혔다. 즉 휘 인문祖는 휘 광봉祖의 직계후손이라는 뜻이다. 인문祖가 광봉祖 직계후손이면 인원(仁元), 인관(仁琯), 인계(仁桂), 인검(仁檢)祖도 광봉祖 후손이 맞다. 왜냐하면 인문祖와 5형제로 되었으니 같은 형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족보사실록에도 7형제로 기록되고 정묘보(丁卯譜:1807년) 등에도 7형제로 전한다고 여러 기록이 전해옵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바로 무진보(戊辰譜:1688년)의 손수祖 방주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仁)자 祖는 7형제가 확실합니다. 따라서 인(仁)자 祖 7형제는 모두 휘 광봉(光逢)祖의 후손(後孫)이다.


우리 후손들은 역사가 증명하는 진실의 인물을 시조로 하여 올바른 족보를 편찬함이 일가 종족간의 화목과 단합을 도모하는 일이다. 이제는 시대가 허구적이고 불확실한 인물을 시조(始祖)라 내세울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명실상부한 깨끗하고 투명한 족보를 편찬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어 조상에 자긍심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 사명이다. 모든 종인이 함평이씨 대종회를 맹신하지 말고 조금만 관심을 갖고서 편견을 버리고 합리적으로 살펴보면 우리가 이글을 쓰는 이유를 이해하리라 본다.


사실 그대로 편수하여 우리 모두가 일가간이며 하나의 핏줄임을 상기할 때 조상을 흠집 내려는 후손이 어디 있겠는가. 명실상부한 함풍이씨 족보를 갖는 것이 소망이다.


이것은 시대의 아픔이고, 여타(餘他)성씨도 최초족보 편수당시에 정확한 계대와 사적을 기록할 수 없었던 것은, 역사 사료의 부재와 종파간에 이해관계를 적절히 조율하며, 자기 가문의 문벌을 자랑하기위하여, “수보청의 (영향력있는 사람)관계자들이 임의로 사적을 조작하고 역사를 왜곡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역사사료가 공개되어 그날의 부도덕함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다.


이제는 덮으려 해도, 덮을 수 가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하루속히 족보의 왜곡된 사적과 계대를 바로잡아, 그날의 상처를 치유하면 그만 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덮으려하니 더욱 악취가 나고 상처가 커지는 것을 함평이씨 대종회는 왜!! 모르는가?”


우리만의 아픔이 아니라는 것과 동병상련의 아픔을 격고 있는 뜻있는 우리일가님 들에게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한 마음을 선물하고자, 아래의 글을 편집하여 옮겨본다.


이 아픔이 우리들만의 아픔이 아니기에 더 이상 숨기고 부끄러워 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이제는 세상 밖으로 드러내고 공론화해서, “치유하는데 모든 역량을 모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참고자료 :(고려사,개성왕씨족보,태종,세조실록,무진보,국조/사마방목 등)


2019년 3월 1일


함풍이씨대종회 청장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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