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仁)자 祖는 7형제가 맞다.(인좌,인형,인원,인관,인계,인검,인문)

이길현
2025-01-12
조회수 726


인(仁)자 祖는 7형제가 맞다.

함풍. 함평 본관은 모두 휘 광봉(光逢)祖 후손이다.

 


시조 휘 광봉祖 5세 인(仁)자 조(祖)는 인좌(仁佐) 인형(仁衡) 인원(仁元) 인관(仁琯) 인계(仁桂) 인검(仁檢) 인문(仁問) 7형제를 이르는 말이다.

 

 

1) 인(仁)자 祖는 7형제가 맞다

 

현재 함평이씨 족보를 살펴보면 5세 광봉조 후손으로 9세에 인좌(仁佐) 인형(仁衡) 2형제를 두었고, 5세 림(琳)조 후손으로 7세에 인원(仁元) 인관(仁琯) 인계(仁桂) 인검(仁檢) 인문(仁問) 5형제라고 기록되었다. 인(仁)자 祖는 인좌(仁佐) 인형(仁衡) 인원(仁元) 인관(仁琯) 인계(仁桂) 인검(仁檢) 인문(仁問)祖의 7형제를 말함이다.

 

원래 인자祖는 7형제다. 왜 7형제 인가? 현존 가장 오래된 함풍(함평)이씨 최초족보 1688년 무진보(戊辰譜)을 살펴보면 답을 찾을 수 있다. 인문祖 후손 10대 손수(孫秀)祖 방주편에 7형제의 근거를 기록해 놓았다. 이를 번역해 보면 “함평종인(咸平宗人) 초보(草譜)에 인문(仁問)은 광봉(光逢)으로 선대(先代)를 삼고 손수(孫秀)를 아들로 삼았는데 양(襄)과 삼언(三言) 2대가 없어 다른 족보(族譜)의 편록(編錄)을 널리 고찰하고 또한 모든 종인(宗人)의 고증(考證)을 따라서 이와 같이 수정한다.” 라고 기록되었다. 무진보가 최초족보인데 다른 족보를 어떻게 살핀단 말인가? 이 말은 원래 인문(仁問)조는 광봉(光逢)조 후손이었다는 말입니다. 인문祖는 광봉祖를 직계 조상으로 모셔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명확한 1차 사료이며 인(仁)자 祖는 7형제라는 근거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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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년 무진보 표지

인문조 후손 손수祖 방주

 (1688년 무진보 , 인문祖 후손 손수祖 방주편 )


원래 인문祖 후손은 광봉祖를 조상으로 모셔왔는데 어떤 힘에 의해 림(琳)祖 후손으로 기록하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족보에 참여는 해야 했으므로 그렇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족보가 주민등록 역할을 하는 시절이라 족보가 있어야 관직에도 나아가고 과거에도 응시할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참여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백년이 흐르면 이와 같은 족보 조작 사실을 후손들이 알 수 없으므로 바뀐 사실을 방주로 기록해 두었던 것입니다. 정말 다행스런 기록입니다. 이 기록이 인자조는 7형제라는 사실을 뒷 받침 해 주는 것입니다. 인문(仁問)祖가 광봉(光逢)祖 후손이면 5형제는 형제니까 당연히 5형제 모두 광봉祖 후손이 맞는 것입니다.

 

2) 족보사실록에도 7형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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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사실록

족보사실록 인좌에 형제7인

죽곡년보

 이사직祖께서 우리 족보의 수보 과정과 왜곡을 낱낱이 기록한 “족보사실록”이 있는데 인좌祖에 이르러 7형제라고 전해왔다고 기록되었다. 또한 문과 급제하시고 대사간을 역임하신 죽곡 이장영祖의 죽곡집(竹谷集) 부록 죽곡년보(竹谷年譜)에 휘 숙(淑)祖의 아들(子)은 원래 7형제였다고 기록했다. 무인보에도 7형제라고 기록되었다. 이렇게 여러 기록이 존재하고 손수祖 방주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인(仁)자 조(祖)는 7형제가 맞고 본관이 함풍.함평이씨 종인 모두는 광봉(光逢)祖 후손이 맞는 것이다.

 

3) 무진보(戊辰譜)에 대한 소송(訴訟) 이야기(족보사실록 추록에서 발췌)

 

“족보사실록(族譜事實錄:1791년)”은 이사직祖께서 우리 족보의 실상을 낱낱이 기록한 문서입니다. 이사직祖 아드님이 이정규祖 이시고 이정규祖께서 “족보사실록 추록(族譜事實錄追錄)”을 작성하셨습니다, 추록(追錄)을 살펴보면 평릉파(인문祖 후손)가 무진보 각주(脚註)에 대하여 부원군측(광봉조)를 상대로 소송(訴訟)을 걸어와서 일어났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함평현감(咸平縣監)에게 소송(訴訟)을 제기했고 함평현감이 홍우길 입니다.

 

평릉파(인문祖 후손)가 무진보(戊辰譜) 손수(孫秀)祖 각주에 ”함평종인 초보에 인문(仁問)은 광봉(光逢)을 선대로 삼았다“가 무진보(戊辰譜) 때 림(琳)자로 투탁(投託)을 하니 각주(방주)에 초보에 광봉(光逢)祖가 선대라고 기록했고 이 각주 부분에 대하여 투탁이 아니라고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현감(縣監)이 양측을 불러서 신문하였고, 현감이 말하길 ”보첩중에 인(仁)자 항렬이 고유 7형제에 이른다고 하는데 , 이 무슨 말입니까?“하니 “ 아버님(이사직)이 이르되 , 이는 저 파(李琳)에 인(仁)자 형제가 5인이고, 우리(광봉) 측에 인(仁)자 형제가 2인인데, 고유(古有) 형제(兄弟) 7인이라는 것은 우리 가문(家門)의 가승(家乘)인 옛 기록(가승첩)에 있습니다. 라고 진술 한 것입니다.

 

홍우길 함평현감이 양측을 대질 신문하고 ”피고(부원군측)의 답변이 옳다”고 했다. 그리고 현감이 평릉파(인문조 후손)를 향해 말하길 ”그 책(무진보)을 보여라.“ 그리고 주각(註脚)을 읽으며 말하길 ” 함평종인 초보인 무진보 이전에는 족보 중에 인문祖는 광봉祖를 선조로 삼고 손수를 아들로 삼았으나 사이에 양과 삼언 2대가 없어 다른 족보를 두루 살펴서 이제 처음으로 기록한다.“ 라는 주각을 읽은 후에 말하길 ” 이 족보는 이미 이것이 초보(처음 족보)인 즉 , 어떻게 다른 족보를 두루 살핀단 말인가? “ 했다. 최종 판결하길 인문(仁問)祖는 선대가 광봉(光逢)祖가 맞다. 평릉파는 돌아가서 널리 알려라. 그리고 판결한 공문서 3통을 만들어 한부는 평릉파에 주고 한부는 피고에 주고 한부는 함평관아에 보관한다고 했다.

 

판결이 끝나자 평릉파는 재판에 지고서 증거인멸(證據湮滅)을 시도했다. 사산사로 와서 화해하자고 유도해서 그곳에서 판결문과 문적을 빼앗아 물항아리에 집어넣어 증거인멸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상기 사항으로 추정해 볼 때 족보조작이 있었다는 것이고 또한 인자조 7형제라는 가승첩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인자조는 7형제가 맞는 것입니다. 판결문과 문적을 빼았아 미리 준비해둔 물항아리에 집어넣어 증거인멸을 시도한 치밀하고 불효막심한 족보 조작 사건입니다. 그래서 손수祖 방주에 ”함평종인 초보에 인문은 광봉을 선대로 삼았는데. . ” 라고 기록해 두면서 어쩔 수 없이 투탁은 하는데 나중에 후손이 바르게 하라는 기록을 남기신 것이죠, 이것만 봐도 광봉(光逢)祖가 선대가 맞고 시조가 분명한 것입니다. 왜 문서를 물항아리에 넣었겠습니까? 숨기는 자가 족보조작을 한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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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이씨 족보사실 추록

당시 재판담당 함평현감 홍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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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仁)자 祖는 고유형제 7인전

당시 가승첩 존재

준비된 물항아리에 문서를 빼앗아 넣음

 


4) 인(仁)자 조(祖) 7형제 의미

 

인자祖가 7형제라는 의미는 본관이 함풍.함평이씨 종인(宗人) 모두는 휘 광봉祖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인원 인관 인계 인검 인문祖 5형제 후손들은 진실을 바로 알고 바른 선조를 찾아야 합니다. 어른들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 해 놓았겠느냐는 소박하고 순진한 생각으로 넘어가시면 안됩니다. 후손에게 더 이상 부끄럽게 하시면 안됩니다. 명확한 사료가 증명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바뀌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가짜 아버지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도 그냥 넘어가시겠습니까? 뭘 더 알려드려야 이해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5형제가 맞다는 근거를 제시해 보세요. 손수조 방주가 틀렸다는 증거 하나라도 제시해 보세요.

 

함평이씨 대종회의 종무를 맡으신 분께서 “광봉(光逢)祖면 어떻고 언(彦)祖면 어떻느냐.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느냐. 왜 불란을 일으키느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종무를 맡으신 분의 생각이라고는 너무도 큰 충격입니다. 1차 사료가 발견되면 전후 좌우를 살펴서 바르게 기록하려는 자세가 종무 담당자의 기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해석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왜곡하면 안됩니다. 또 어떤 분은 시조를 다수결로 하면 안되느냐고 하십니다. 어떻게 부모를 다수결로 결정할 수 있습니까? 다수결로 한다면 세계적 코미디가 될 것입니다. 현존하는 사료만 가지고도 명확히 밝혀지는 사안입니다. 함풍.함평이씨의 선조님과 전 종친의 위상을 정립하는 중차대한 업무를 너무나 쉽게 생각하는 자세가 안타까웠습니다. 중요한 역할을 맡으신 분의 의식이라고는 제 귀를 의심할 정도입니다. 그 많은 비석과 기록을 어떻게 수정할까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시조를 바르게 모시는 것이 우선입니다. 비석과 기록을 수정하는 일이 두려워 시조를 방치한다는 생각은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나중에 생각할 일입니다. 후손들에게 더 이상 죄를 짖지 말고 치욕을 물려주지 맙시다. 떳떳이 잘못을 수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디에 내놓아도 훌륭하신 휘 광(光)자 봉(逢)자 시조님을 바르게 모셔드리는 것이 이 시대의 후손이 할 일입니다.

글 : 길현(행) 총무국장/ 지평공파 (참고자료 : 족보사실, 무진보, 죽곡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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