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풍이씨 유래
고려초기에는 군봉도 부원군도 없었다.
“함평이씨 시조 이언(李彦)은 고려 태조 때 사람“이라고 함평이씨 족보는 기록하고 있다. 기록의 진위는 역사가들의 옛 문헌에 따른 연구와 고증을 거쳐 밝혀지고, 그래야 주장하는 바가 객관적으로 설득력을 갖게 된다. 우리의 역사를 함평이씨 족보처럼 일개 문중이 아전인수 격으로 기록해서는 안 된다.
고려초기에는 신라의 골품제가 붕괴되고 지방의 호족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여 정치표면에 나서게 된다. 이 새로운 세력은 사회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며, 새로운 정치사상으로 유교를 받아들이고 사회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후삼국의 분열은 이러한 호족세력의 대두에 따른 결과이다.
송악지방의 호족출신인 왕건에 의한 고려왕조의 성립은 이들 신흥세력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고려왕조의 개창은 하나의 역성혁명일 뿐 아니라 새로운 호족세력에 의한 고대국가 체제의 극복이라 하겠다.
특히 신라 말 고려 초에 나타난 농민의 지위향상은 새로운 사회의 표징이었다. 신라후기 농업생산력의 증대로 농민이 성장하고, 후삼국 혼란기의 농민반란에 의한 농민의식 상승 또한 농민의 지위향상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이 호족세력 위에 성립한 새로운 고려사회는 왕권이 절대 권력을 쥘 수가 없었다. 지방의 호족들이 중앙 정치에 참여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주인공이 됨으로서 고려사회는 문벌귀족사회의 성격을 띠었다. 문벌귀족이 지배층으로서 고려사회의 모든 면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는 고려사회를 오늘날 사가들이 귀족사회로 규정하는 이유이다.
이런 시기에 고려 태조 때 ‘함평이씨 시조 이언을 ‘함풍군에 봉했다. 부원군이다’ 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며 허위 기록인 것이다. 특히 '신무위대장군' 운운하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절대권력을 누리지 못했던 왕이 당시에 이런 벼슬을 누구에게 하사할 수 있었겠는가!
중세에 일어난 무신정권이 문신 귀족정치를 붕괴시키고 고려사회의 흐름을 변화시켰는데, 100년간 계속되던 무신정권도 내부에서 분열되고, 때를 같이하여 몽고의 침략으로 다시 권문세족이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우리 함풍이씨의 시조 이광봉(李光逢)조가 바로 이 시기에 나타나게 된다. 역사의 기록은 고려조 충렬왕 원년에 벼슬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으니 그 때부터 고려의 권문세족으로서 사회지배계층이었다고 하겠다.
당시 문벌귀족들은 신분사회를 유지하기위하여 그들 상호간에 혼인관계를 맺었다. 우선 귀족들은 최고의 가문인 왕실과 통혼을 하거나 격이 높은 가문들 간에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어 폐쇄적인 통혼권을 형성하였다.
고려의 대표적인 귀족가문은 안산김씨와 인주이씨였다. 안산김씨는 김은부(金殷傅)의 가문이고 인주이씨는 이자연(李子淵)의 가문이다. 안산김씨는 현종부터 문종까지 왕실의 외척이 되었고 인주이씨는 문종부터 인종 때까지 왕실의 외척이 되어 정권을 독점하였다. 이 밖에도 최충의 해주최씨, 윤관의 파평윤씨, 김부식의 경주김씨 등이 고려에 이름 있는 문벌 귀족이다.
이 당시에는 ‘함풍’이라는 본을 가진 이(李)씨는 없었다. 고려 초 이언(李彦)이 함풍군으로 함풍이씨라고 하는 것은 역사를 모르는 자들이 아전인수 격으로 꾸며 놓은 거짓 기록이다. 함평이씨 족보상에 “5세 함풍부원군 이광봉(李光逢)조는 고려조의 삼충신이라 불리울 만큼 임금께 혁혁한 공을 세워 「벽상 삼한삼중 대광보국 좌명공신 함풍부원군」”이 되셨고 그 후손들이 그 시호를 따서 함풍이씨로 성관했던 것이다. 휘 광봉(光逢)조가 함풍(함평)이씨 시조 이시다
글/ 권행 / 교수공파
함풍이씨 유래
고려초기에는 군봉도 부원군도 없었다.
“함평이씨 시조 이언(李彦)은 고려 태조 때 사람“이라고 함평이씨 족보는 기록하고 있다. 기록의 진위는 역사가들의 옛 문헌에 따른 연구와 고증을 거쳐 밝혀지고, 그래야 주장하는 바가 객관적으로 설득력을 갖게 된다. 우리의 역사를 함평이씨 족보처럼 일개 문중이 아전인수 격으로 기록해서는 안 된다.
고려초기에는 신라의 골품제가 붕괴되고 지방의 호족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여 정치표면에 나서게 된다. 이 새로운 세력은 사회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며, 새로운 정치사상으로 유교를 받아들이고 사회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후삼국의 분열은 이러한 호족세력의 대두에 따른 결과이다.
송악지방의 호족출신인 왕건에 의한 고려왕조의 성립은 이들 신흥세력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고려왕조의 개창은 하나의 역성혁명일 뿐 아니라 새로운 호족세력에 의한 고대국가 체제의 극복이라 하겠다.
특히 신라 말 고려 초에 나타난 농민의 지위향상은 새로운 사회의 표징이었다. 신라후기 농업생산력의 증대로 농민이 성장하고, 후삼국 혼란기의 농민반란에 의한 농민의식 상승 또한 농민의 지위향상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이 호족세력 위에 성립한 새로운 고려사회는 왕권이 절대 권력을 쥘 수가 없었다. 지방의 호족들이 중앙 정치에 참여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주인공이 됨으로서 고려사회는 문벌귀족사회의 성격을 띠었다. 문벌귀족이 지배층으로서 고려사회의 모든 면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는 고려사회를 오늘날 사가들이 귀족사회로 규정하는 이유이다.
이런 시기에 고려 태조 때 ‘함평이씨 시조 이언을 ‘함풍군에 봉했다. 부원군이다’ 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며 허위 기록인 것이다. 특히 '신무위대장군' 운운하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절대권력을 누리지 못했던 왕이 당시에 이런 벼슬을 누구에게 하사할 수 있었겠는가!
중세에 일어난 무신정권이 문신 귀족정치를 붕괴시키고 고려사회의 흐름을 변화시켰는데, 100년간 계속되던 무신정권도 내부에서 분열되고, 때를 같이하여 몽고의 침략으로 다시 권문세족이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우리 함풍이씨의 시조 이광봉(李光逢)조가 바로 이 시기에 나타나게 된다. 역사의 기록은 고려조 충렬왕 원년에 벼슬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으니 그 때부터 고려의 권문세족으로서 사회지배계층이었다고 하겠다.
당시 문벌귀족들은 신분사회를 유지하기위하여 그들 상호간에 혼인관계를 맺었다. 우선 귀족들은 최고의 가문인 왕실과 통혼을 하거나 격이 높은 가문들 간에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어 폐쇄적인 통혼권을 형성하였다.
고려의 대표적인 귀족가문은 안산김씨와 인주이씨였다. 안산김씨는 김은부(金殷傅)의 가문이고 인주이씨는 이자연(李子淵)의 가문이다. 안산김씨는 현종부터 문종까지 왕실의 외척이 되었고 인주이씨는 문종부터 인종 때까지 왕실의 외척이 되어 정권을 독점하였다. 이 밖에도 최충의 해주최씨, 윤관의 파평윤씨, 김부식의 경주김씨 등이 고려에 이름 있는 문벌 귀족이다.
이 당시에는 ‘함풍’이라는 본을 가진 이(李)씨는 없었다. 고려 초 이언(李彦)이 함풍군으로 함풍이씨라고 하는 것은 역사를 모르는 자들이 아전인수 격으로 꾸며 놓은 거짓 기록이다. 함평이씨 족보상에 “5세 함풍부원군 이광봉(李光逢)조는 고려조의 삼충신이라 불리울 만큼 임금께 혁혁한 공을 세워 「벽상 삼한삼중 대광보국 좌명공신 함풍부원군」”이 되셨고 그 후손들이 그 시호를 따서 함풍이씨로 성관했던 것이다. 휘 광봉(光逢)조가 함풍(함평)이씨 시조 이시다
글/ 권행 / 교수공파